포퓰리즘 만세
요즘 우리 사회 돌아가는 품새가 수상쩍다.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 아니면 아예 명함도 못내밀 세상이 돼버린 듯하다. 정치가나 사회단체나 시민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지난 설연휴 매스컴에서는 한국정치를 바라보는 성난 ‘설날 민심’을 전하기에 바빴다. 부정부패와 사익 챙기기에 골몰하는 정치가들을 향한 시민의 분노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던 시민들이 고속도로를 달리며 차창 밖으로 내던진 쓰레기더미에 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한국도로공사가 밝힌 고속도로변 쓰레기 수거현황에 따르면 지난 설 연휴동안 버려진 시민의 양심은 무려 194.6t. 이런 무책임하고 공공의식이 결여된 시민들이 바로 한국정치에 분노하는 설날민심의 실체아니었을까. 환경미화원들이 쓰레기를 치우는 동안 이들은 고향집 사랑방에 둘러앉아 ‘국회의원의 85%를 물갈이 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드높였다.
한강 팔당호는 수도권 2300만명의 젖줄이다. 국민의 절반이 팔당호의 수질에 건강을 담보잡고 있는만큼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팔당호 주변은 음식점이나 러브호텔 등으로 넘쳐난다. 이런 시설물들에서 마구잡이로 흘러나오는 오염물질이 상수원 오염의 직접적 원인이다.
물론 이런 난개발의 1차 책임은 정부당국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국가 이슈가 있을때마다 벌떼처럼 달려드는 환경단체들 가운데 팔당호 주변 시설물의 오폐수 방출을 막으려는 캠페인을 벌이거나 지역 주민들의 양심불량을 탓하는 단체는 본적이 없다. 왜 그럴까. 시민을 비판해봐야 인기만 추락할테니까?
매스컴이나 정당, 정부, 사회단체들이 시민사회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에 침묵한지는 이미 오래다. 아니 오히려 경쟁적으로 모럴 해저드 조장에 나서고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신용카드 회사들의 현금서비스 수수료 강제인하일 것이다. 시민단체들은 서민 편이라며 앞장서서 수수료 인하를 요구하고 나섰고 정부까지 이에 영합해 오늘날의 ‘카드악몽’을 재촉하고 말았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공적자금이나 다를바 없는 산업은행으로의 책임 떠넘기기였다. 그렇게 카드위기의 막은 내려가고 있지만 책임 규명에 관해서만큼은 모두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만일 카드사들이 정부나 시민단체의 개입없이 스스로 현금대출 금리를 인상하고 예대마진을 확대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소비자는 대출에 좀더 신중을 기했을 것이고 오늘날 신용불량자수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카드채 위기의 강도 역시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완화됐을 것이다. 카드사 자체의 모럴 해저드 부분에 대해서도 식별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이 지금은 포퓰리즘에 물말아먹기로 끝나고 말았다.
시민단체의 포퓰리즘은 이제 아파트 분양가 원가공개 요구로 무대를 옮기고 있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서 더욱 두려운 것은 이윤이 많은 기업일수록 악덕(惡德)이라는 윤리적 판단이 이들에의해 국민 의식 속에 주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민단체들은 원가공개 요구가 사기업의 경영권 간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 둔감하다. 부동산 투기의 범죄자를 찾는다는 것이 자칫 마녀사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뒤돌아 보려하지 않는다.
대중에의 영합때문에 모두가 침묵하는 사이 정당들까지 드러내놓고 포퓰리즘으로 치닫는다. 지난주 열린우리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개인채무 회생법안’은 채무자들에게 갚을 수 있을만큼만 갚으면 나머지는 법원이 탕감해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홍콩이 채무자동소멸법을 도입한 직후인 2002년 파산자수가 2800%나 폭증했다는 선례조차 이들 정치집단은 오불관언이다.
포퓰리즘은 이렇게 우리 사회의 골간을 병들게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않는다. 하긴 내일 어찌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늘을 먹고 마시고 즐기면 그뿐이다. 포퓰리즘 만세.
이신우 / 문화일보 논설위원
요즘 우리 사회 돌아가는 품새가 수상쩍다.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 아니면 아예 명함도 못내밀 세상이 돼버린 듯하다. 정치가나 사회단체나 시민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지난 설연휴 매스컴에서는 한국정치를 바라보는 성난 ‘설날 민심’을 전하기에 바빴다. 부정부패와 사익 챙기기에 골몰하는 정치가들을 향한 시민의 분노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던 시민들이 고속도로를 달리며 차창 밖으로 내던진 쓰레기더미에 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한국도로공사가 밝힌 고속도로변 쓰레기 수거현황에 따르면 지난 설 연휴동안 버려진 시민의 양심은 무려 194.6t. 이런 무책임하고 공공의식이 결여된 시민들이 바로 한국정치에 분노하는 설날민심의 실체아니었을까. 환경미화원들이 쓰레기를 치우는 동안 이들은 고향집 사랑방에 둘러앉아 ‘국회의원의 85%를 물갈이 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드높였다.
한강 팔당호는 수도권 2300만명의 젖줄이다. 국민의 절반이 팔당호의 수질에 건강을 담보잡고 있는만큼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팔당호 주변은 음식점이나 러브호텔 등으로 넘쳐난다. 이런 시설물들에서 마구잡이로 흘러나오는 오염물질이 상수원 오염의 직접적 원인이다.
물론 이런 난개발의 1차 책임은 정부당국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국가 이슈가 있을때마다 벌떼처럼 달려드는 환경단체들 가운데 팔당호 주변 시설물의 오폐수 방출을 막으려는 캠페인을 벌이거나 지역 주민들의 양심불량을 탓하는 단체는 본적이 없다. 왜 그럴까. 시민을 비판해봐야 인기만 추락할테니까?
매스컴이나 정당, 정부, 사회단체들이 시민사회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에 침묵한지는 이미 오래다. 아니 오히려 경쟁적으로 모럴 해저드 조장에 나서고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신용카드 회사들의 현금서비스 수수료 강제인하일 것이다. 시민단체들은 서민 편이라며 앞장서서 수수료 인하를 요구하고 나섰고 정부까지 이에 영합해 오늘날의 ‘카드악몽’을 재촉하고 말았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공적자금이나 다를바 없는 산업은행으로의 책임 떠넘기기였다. 그렇게 카드위기의 막은 내려가고 있지만 책임 규명에 관해서만큼은 모두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만일 카드사들이 정부나 시민단체의 개입없이 스스로 현금대출 금리를 인상하고 예대마진을 확대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소비자는 대출에 좀더 신중을 기했을 것이고 오늘날 신용불량자수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카드채 위기의 강도 역시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완화됐을 것이다. 카드사 자체의 모럴 해저드 부분에 대해서도 식별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이 지금은 포퓰리즘에 물말아먹기로 끝나고 말았다.
시민단체의 포퓰리즘은 이제 아파트 분양가 원가공개 요구로 무대를 옮기고 있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서 더욱 두려운 것은 이윤이 많은 기업일수록 악덕(惡德)이라는 윤리적 판단이 이들에의해 국민 의식 속에 주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민단체들은 원가공개 요구가 사기업의 경영권 간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 둔감하다. 부동산 투기의 범죄자를 찾는다는 것이 자칫 마녀사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뒤돌아 보려하지 않는다.
대중에의 영합때문에 모두가 침묵하는 사이 정당들까지 드러내놓고 포퓰리즘으로 치닫는다. 지난주 열린우리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개인채무 회생법안’은 채무자들에게 갚을 수 있을만큼만 갚으면 나머지는 법원이 탕감해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홍콩이 채무자동소멸법을 도입한 직후인 2002년 파산자수가 2800%나 폭증했다는 선례조차 이들 정치집단은 오불관언이다.
포퓰리즘은 이렇게 우리 사회의 골간을 병들게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않는다. 하긴 내일 어찌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늘을 먹고 마시고 즐기면 그뿐이다. 포퓰리즘 만세.
이신우 / 문화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