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정국은 法治전환의 기회 (유병규)

by 永樂 posted Mar 16, 2004
탄핵정국은 法治전환의 기회



대통령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대통령의 행위에 대해 국회가 정치적 심판을 하고 이제 이것을 헌법재판소에서 사법적 판결을 하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교과서에나 실려 있던 ‘3권 분립’이 무엇이라는 것을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몸소 체험하는 ‘횡재’를 얻게 됐다. 외환 위기 때 전국민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비롯한 경제 제도와 현상에 대해 전문가가 됐듯이, 이제는 모두가 ‘탄핵’이니 ‘헌재’니 하는 정치 사회 제도 전반에 대한 지식 수준이 한층 높아지게 된 셈이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가 완벽하게 가동되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 주기 위해 국내 정치 지도자들은 엄청난 자기 희생을 감수했다. 나라의 통합과 안정, 그리고 발전을 생각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국가 지도자이기보다, 당리당략과 자기 이해 관계에 얽매여 국정과 국민을 담보로 삼는 직업 정치꾼으로의 자기 모습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던져진 탄핵이라는 충격파를 앞으로 어떻게 흡수해 나가야 할 것이냐라는 것이다. 헌재의 탄핵 심판 과정과 총선이 얽혀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앞으로의 전개 과정은 무수한 시나리오의 조합이 가능하다.

가장 끔찍한 예상은 벌써부터 그 조짐이 보이고 있는 정파간 ‘모든 것을 얻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극한적 영화(零化, zero―sum) 게임’이 펼쳐지는 것이다. 상상하기도 싫은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싸움판에서 또 어떠한 치졸한 발상과 술수가 전개될지 모를 일이다. 정쟁(政爭)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멍이 드는 것은 결국 서민들의 경제 생활이다.

그야말로 이제 겨우 경기 회복의 불씨가 하나둘씩 조심스레 살아나고 있는 판에 정국의 불확실성이 짙어지고, 사회의 불신이 높아지며, 앞날의 불안감이 커지면 누가 소비를 하고 투자를 할 것인가? 난장판이 된 국회의사당과 연일 벌어지는 군중 집회를 실시간으로 각종 뉴스 매체를 통해 접하는 외국인들은 과연 우리를 민주주의 선진국으로만 바라보겠는가?

어떻게 해서든 탄핵 충격의 여파가 시간이 흐를수록 확산하지 않고 수렴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이번 사태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가운데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선, 탄핵 결정은 잘잘못의 여부를 떠나 기왕에 인정되는 우리 사회의 리더십에 대한 권위가 붕괴됐다는 의미를 지닌다. 외환 위기를 계기로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대기업의 신화가 깨지고 여당 필승(與黨必勝)이라는 정권의 신화가 깨어졌다면, 이제 정치 위기를 통해 그동안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대권 신화가 무너진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새로운 리더십의 내용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독선과 아집으로 분열과 당파를 조장하는 ‘군림하는 주인’의 리더십이 아니라, 사분오열(四分五裂)돼 있는 국론을 결집하고 서로 분노하는 국민 정서를 통합하기 위해 개인과 당파의 이해 관계를 초월할 수 있는 분명한 비전과 가치관, 그리고 희생 정신을 갖춘 ‘섬기는 종’의 리더십이다.

두 번째로, 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에서 내연하고 있는 계층간·세대간 갈등이 절정에 달했음을 시사해 준다. 대다수가 예상하지 않았던 참여정부의 출범이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을 통해 이뤄진 디지털 세대의 반란이었다면, 역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탄핵 가결은 국회라는 실제 공간에서 아날로그 세대들이 벌인 대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최고점에 다다른 갈등이 파국으로 내닫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제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할 수 있는 진지한 대화의 장(場)을 학술 활동이나 방송·신문과 같은 언론 매체들을 통하여 만들어야 할 때다. 어떤 점에서 서로 생각이 다른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등을 서로 대화하는 가운데, 국가 공동체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서로 간의 공통점을 찾고 양보하고 협력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번 충격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의의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앞으로 우리 사회를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인치(人治) 사회’에서 법과 시스템에 의해 움직여지는 ‘법치(法治) 사회’로 온전히 전환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부터 우리 경제 사회의 안정성 정도는 바로 우리 모두가 얼마나 법과 제도를 준수하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몇 개월 동안 법과 시스템에 의해 통치력 공백의 어려움을 무난히 극복할 수 있다면, 한국은 21세기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값비싼 학습 비용을 그다지 아깝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유병규 /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