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안없는 정치 >>
집권자가 돈주며 야당관리 … 야당살려야 집권당도 살아
한국의 야당은 지금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어쩌면 여기서 주저앉을는지도 모른다.
누구를 탓할 것 없이 자업자득이다.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야당, 또는 같은 논리로 한국의 정당들이 왜 이렇게 정치자금 문제에서 오물을 뒤집어쓰게 됐는가를 한 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날 군사정권 시절, 야당의 정치자금은 철저히 집권세력에 의해 통제되고 조종됐었다. 집권세력은 야당에 돈이 직접 들어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집권측이 기업 또는 차관자금으로부터 거두거나 떼어내 자기들 쓰고, 약간씩―어느 중진 야당의원의 표현대로 “죽지 않을 만큼만” ―야당에 건네줬다. 민주화에 정치생명을 바치다시피 한, 그래서 끝내 대통령의 꿈을 이룬 두 전직 ‘야당 지도자’도 큰 테두리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사쿠라 논쟁’은 그런 배경을 말해준다. ‘3당 통합’도 따지고 보면 야당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오로지 그들과 ‘야합’해서만이 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당시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20억+α’는 집권측이 야당에 준 정치자금의 한 부호(符號) 같은 것이다.
과거 안기부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야당의 자금줄을 캐고 돈을 차단하며 여권의 허가(?) 없이 돈 준 사람을 혼내주는 일이었다는 것을 당시의 관계자는 다 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집권측은 국민의 불만과 분노가 거리로 뛰쳐나오지 못하게 야당이라는 ‘제도’ 안에 묶어 두는 방편의 하나로 야당을 ‘관리’하려 했고, 그것을 돈으로 해결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당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특히 당내의 계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금의 공급이 불가피했고, 또 자신의 당선을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던 야당의 지도자들에게 ‘제공된 정치자금’이야말로 ‘울며 겨자먹기’였다. 한 야당지도자는 “돈을 받는 것은 받는 것이고 반대하는 것은 반대하는 것”이라고 했고, “정치자금이라는 것은 왼쪽 주머니로 들어와 그대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며 ‘공용성(公用性)’으로 그것을 합리화하려 했다.
이들이 이런 어려운 상황을 뚫고 집권한 뒤 정치자금의 관치(官治) 또는 여치(與治)행태는 없어졌다. 문제는 그것이 정치자금의 공개적이고 투명한 흐름으로 제도화되지 못하고, 음성적 자유화로 맥없이 풀려버린 데 있다. 그때부터 정당, 특히 야당은 집권가능성을 무기(武器)로 기업을 음양으로 협박(?)해서 돈을 뜯기 시작했다. 이제는 ‘고삐’마저 풀려버렸다. 이미 과거 정치자금에 중독(?)된 여당의 후신(後身)으로서는 더더욱 당연한 현상이었다.
정치자금에 관한 한 결코 무죄일 수 없었던 ‘어제의 야당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비리’를 관리하는 일에도 역부족이었다. 결국 정치자금은 집권측이건, 야당이건 ‘10분의 1’이라는 간격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제 한국의 정치는 야당의 지리멸렬과 함께 대안(代案) 없는 정치로 몰려가고 있다. 대안 없는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니다. 과거 암울했던 시절, 국민은 그 시절에도 야당이라는 대안, 민주 투사라는 ‘언덕’이 있었기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 말은 결코 한나라당이라는 현실적 야당의 구체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제도로서의 야당이 죽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뿐이다. 정치적 반대와 비판을 거리나 광장으로 몰리게 하지 않고 의회를 통해 소화하기 위해서는 대안을 살려가야 한다. 대안 없는 정치는 집권측을 오만하게 하고 비만하게 한다. 의회가 우군화(友軍化)되지 않았더라면 부시의 이라크 침공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선거는 야당에 엄한 벌(罰)을 내릴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 벌 때문에 대안의 존재마저 말살할 수는 없다. 집권세력이 죽이려 해도 국민이 살려야 한다. 야당이 살아야 집권측도 산다. 그런 관점에서 과거의 정치 지도자, 특히 권력정상에 올랐던 YS, DJ, JP 등에게 간곡히 청해 본다. 이제 영욕의 세계를 떠난 이들이 어제의 정치자금 관행과 실태와 원죄(原罪)를 국민 앞에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김대중·조선일보 이사기자)
집권자가 돈주며 야당관리 … 야당살려야 집권당도 살아
한국의 야당은 지금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어쩌면 여기서 주저앉을는지도 모른다.
누구를 탓할 것 없이 자업자득이다.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야당, 또는 같은 논리로 한국의 정당들이 왜 이렇게 정치자금 문제에서 오물을 뒤집어쓰게 됐는가를 한 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날 군사정권 시절, 야당의 정치자금은 철저히 집권세력에 의해 통제되고 조종됐었다. 집권세력은 야당에 돈이 직접 들어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집권측이 기업 또는 차관자금으로부터 거두거나 떼어내 자기들 쓰고, 약간씩―어느 중진 야당의원의 표현대로 “죽지 않을 만큼만” ―야당에 건네줬다. 민주화에 정치생명을 바치다시피 한, 그래서 끝내 대통령의 꿈을 이룬 두 전직 ‘야당 지도자’도 큰 테두리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사쿠라 논쟁’은 그런 배경을 말해준다. ‘3당 통합’도 따지고 보면 야당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오로지 그들과 ‘야합’해서만이 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당시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20억+α’는 집권측이 야당에 준 정치자금의 한 부호(符號) 같은 것이다.
과거 안기부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야당의 자금줄을 캐고 돈을 차단하며 여권의 허가(?) 없이 돈 준 사람을 혼내주는 일이었다는 것을 당시의 관계자는 다 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집권측은 국민의 불만과 분노가 거리로 뛰쳐나오지 못하게 야당이라는 ‘제도’ 안에 묶어 두는 방편의 하나로 야당을 ‘관리’하려 했고, 그것을 돈으로 해결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당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특히 당내의 계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금의 공급이 불가피했고, 또 자신의 당선을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던 야당의 지도자들에게 ‘제공된 정치자금’이야말로 ‘울며 겨자먹기’였다. 한 야당지도자는 “돈을 받는 것은 받는 것이고 반대하는 것은 반대하는 것”이라고 했고, “정치자금이라는 것은 왼쪽 주머니로 들어와 그대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며 ‘공용성(公用性)’으로 그것을 합리화하려 했다.
이들이 이런 어려운 상황을 뚫고 집권한 뒤 정치자금의 관치(官治) 또는 여치(與治)행태는 없어졌다. 문제는 그것이 정치자금의 공개적이고 투명한 흐름으로 제도화되지 못하고, 음성적 자유화로 맥없이 풀려버린 데 있다. 그때부터 정당, 특히 야당은 집권가능성을 무기(武器)로 기업을 음양으로 협박(?)해서 돈을 뜯기 시작했다. 이제는 ‘고삐’마저 풀려버렸다. 이미 과거 정치자금에 중독(?)된 여당의 후신(後身)으로서는 더더욱 당연한 현상이었다.
정치자금에 관한 한 결코 무죄일 수 없었던 ‘어제의 야당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비리’를 관리하는 일에도 역부족이었다. 결국 정치자금은 집권측이건, 야당이건 ‘10분의 1’이라는 간격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제 한국의 정치는 야당의 지리멸렬과 함께 대안(代案) 없는 정치로 몰려가고 있다. 대안 없는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니다. 과거 암울했던 시절, 국민은 그 시절에도 야당이라는 대안, 민주 투사라는 ‘언덕’이 있었기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 말은 결코 한나라당이라는 현실적 야당의 구체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제도로서의 야당이 죽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뿐이다. 정치적 반대와 비판을 거리나 광장으로 몰리게 하지 않고 의회를 통해 소화하기 위해서는 대안을 살려가야 한다. 대안 없는 정치는 집권측을 오만하게 하고 비만하게 한다. 의회가 우군화(友軍化)되지 않았더라면 부시의 이라크 침공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선거는 야당에 엄한 벌(罰)을 내릴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 벌 때문에 대안의 존재마저 말살할 수는 없다. 집권세력이 죽이려 해도 국민이 살려야 한다. 야당이 살아야 집권측도 산다. 그런 관점에서 과거의 정치 지도자, 특히 권력정상에 올랐던 YS, DJ, JP 등에게 간곡히 청해 본다. 이제 영욕의 세계를 떠난 이들이 어제의 정치자금 관행과 실태와 원죄(原罪)를 국민 앞에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김대중·조선일보 이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