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보수의 실패 '10년 진보시대' 여나

by 이윤주원 posted Mar 22, 2004
[탄핵정국시론] 보수의 실패 '10년 진보시대' 여나

촛불시위는 자발적 시민의 등불 … '업적없는 진보'도 용인될 수 없어

  
▲ 송호근 / 서울대 교수  
  
너무도 충격적인 그 장면이 연출된 지 열흘이 지났다. 분노와 환호가 교차하면서 공론장을 달구던 열기가 어느 정도 정돈되는 듯하다. 이쯤 해서 시민들은 서로 격렬하게 부딪는 두 개의 논리 중 하나에 생각의 닻을 내렸을 것이다.

여야의 희비가 엇갈리고 시민들의 마음이 쪼개지는 모습을 보면서 정치인들, 그리고 누구보다 대통령은 착잡한 심정일 것이다. 탄핵은 위기에 빠진 보수 기득권 세력의 총반격이거나, 충돌의 정치가 빚어낸 비극일 수 있다. 또는 미완(未完)의 민주화 프로젝트에 내재된 모순의 폭발일 수도 있다.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국민의 ‘마음의 행로’다. 국민의 분노가 폭증한 이유는 이렇다. 대통령의 ‘경미한 위법’에 대해 탄핵은 아무래도 과도한 중벌이라는 판단이 하나고, 도덕성이 파탄난 대도(大盜)가 실정(失政)의 재판관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게 다른 하나다.

심판에는 자격이 필요하다. 대통령을 심판해서 자격을 회복하려던 야당의 의도는 국민의 그런 심성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국민들은 서툰 정치보다는 부패 정치와 보수 엘리트 집단의 폐쇄성에 더 염증을 내왔다. 정치는 반전(反轉)의 묘미를 연출하기에 충분히 매혹적이다.

보수는 정치적 지지 성향이 급속히 바뀌었음을 외면한다. 가장 주목할 것은 지난 대선에서 황금 분할로 나뉘었던 40대가 반(反)보수세력으로 기울고 있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에 대한 실망보다 민주화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야당의 시대착오적 역행(逆行)을 더 관용할 수 없는 탓이다.

거리의 촛불은 시민 민주주의를 위해 자발적으로 켠 등불이다. 시민들은 한국판 대의 민주주의가 봉착한 한계를 확인한 그 자리에 희망의 등불을 켜고 싶은 것이다. 그 행동에는 반복되는 위기 생산적 정치 기제를 축제 의례로 투사시켜 시민적 견제가 가능한 정치 기제로 교체하려는 시대적, 세대적 대응 양식이 숨어 있다. 그것을 친노(親盧)의 홍위병, 진보의 독전대(督戰隊)로 보려는 시각은 퇴행적이다.

탄핵 사태는 단순하게 막을 내릴 것이다. 문제는 향후 정국이다. 총선 후 한국 사회는 상처받은 대통령, 달라진 정당 구도, 이념 격돌이 뒤섞여 극도의 불협화가 터져나올 전망이다. 통치 스타일을 바꾸지 않는 한 대통령은 ‘정치판의 대청소’를 완료하려 하고, 위축된 야당은 사생결단의 방어전을 전개할 것이다.

여러 갈래로 균열된 사회 집단은 사소한 쟁점에 대해서도 선명성 투쟁을 벌일 것이다. 참여 과잉은 정치 혼란과 지배력의 약화를 야기한다. 여당 독주 상태라도, 한목소리가 아닌 참여 과잉을 현재의 제도가 담아내기 어렵다. 여기에 지지율 20%대의 대통령이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한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이념 투쟁이다.

필자는 현 단계의 이념 대립은 필연적 홍역이라고 생각한다. 진보 이념과 세력의 등장이 보수의 거듭된 실패에서 비롯되었다면, 문제는 변신을 거부하는 경직된 보수다. 경직된 보수는 적어도 향후 10년간 진보의 상승 시대를 개화시킨다. 노무현 정권은 한국 현대사에서 진보 정치의 첫발을 뗀 것에 불과하다. 대의 정치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는 한 거리의 시민들은 진보 쪽으로 기울고, 그들을 ‘동원된 세력’으로, 핵심을 ‘좌파 파시즘’으로 공격하면 보수의 미래는 없다.

그렇다고 노 대통령의 ‘승부 정치’가 간단히 면책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1년간 목격하였듯이, 승부 정치는 냉정한 시민 의식에 비춰 포용력과 능력의 한계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인내심이 커졌다 해도 ‘업적 없이 소란한 진보’를 무한정 용인하지는 않는다.

이념 대립은 결국 업적이 판가름한다. 기대치만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면서 민주·반민주 전선을 강조하는 열린우리당이 어떤 업적으로 이념 대립의 덫을 넘을 것인가가 궁금하다.

(송호근·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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