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계몽에 의해서 거짓 신화에 이끌려온 역사 청산의 기운이 바야흐로 한반도를 덮기 시작했다. 이는 한갑자에 가까운 분단의 굴레에 갇혀 현실을올바로 보지 못하고 환영(幻影)과 미몽(迷夢)에 빠져온 한국민의 자각과 성찰의 자체-계몽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석유패권과 달러화 수호를 위해 이라크에서 추악한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구역질나는 본질은 - 그것이 자본이든 군사력이든 - 더 이상 이해와 동정의 여지를 구할 수 없는 도덕적 치부를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주었다.
한국전쟁 끝물에서, 핵사용을 불사하려던 맥아더의 호전적 전략판단이 뒷걸음치고 결국 굴복으로 휴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이승만의 무지몽매가 한미- 혹은 한미일 -동맹이라는 거짓 계몽과 신화 속에서 한국민을 노예로 만들고 -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만취해서 한국시민을 흉기로 찌를 미군의 희희낙락하는 오만방자는 계속된다 - 파블로프의 개처럼 한미동맹만을 절대 신조로 숭앙하도록 길들여왔다.
이제 감전의 상황은 끝났는데도, 앞선 원숭이들이 감전사한 공포의 기억 때문에 과감히 철조망을 넘지 못하는 후배 원숭이들의 슬픈 역사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된다. 마지막 몸부림으로, 보수적인 노무현 정부까지를 친북좌파로 몰아붙이는 조갑제나 김대중의 처절함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제 친일에서 친미까지 외세에 기생하며 온갖 권력과 자본의 특혜를 누려온 소위 수구의 몸부림은 그 종착역을 향해서 마지막 경적을 울리고 있다.
시대를 꿰뚫어보는 특별한 혜안이 아니라 하더라도, 21세기 한국역사를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이나 사상 원리를 잘 모르는 무지랭이 촌부나 공장일꾼이라도 이제 무엇이 정의이고 힘이며 누가 악이고 선인가를 알만큼 이 시대는 또 다른 계몽의 사다리를 타고 새로운 역사창조의 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2002년의 월드컵을 통해 불타오른 참여문화의 불길은 -그것을 수구 세력들은 온갖 포퓰리즘으로 폄하하려고 기를 씀에도 불구하고 -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대세이자 역사의 법칙으로 뚜벅뚜벅 그 길을 당차게 걸어가고 있다. 효순 미선의 고통에 동참한 촛불시위가 탄핵기각과 이라크 파병 철회를 요구하는 시민의 힘으로 결집되는 이 순간까지의 지난 역사가 이를 온몸으로 증명하지 않는가!
우리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일제찌꺼기의 독소를 스스로 정화하지 못한 채 - 미국의 패권 앞에 한없이 초라한 종속의 길을 걸어왔으면서도 이주 노동자 억압을 예로 보듯이 국가든 개인이든 약자에게는 서구의 흰 가면을 쓴 사실도 망각한 채, 스스로 강해지려는 패권이데올로기를 휘두르려는 - 미국의 강한 힘 앞에서 무릎을 펼 줄 모르고 살아왔다.
시장에서, 군대에서, 극장에서, 심지어 교실에서조차 미국-자본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와 남근적 권위 앞에서 고개를 숙여왔다. 그리고 그 모든 체계의 정점에 한-미 동맹의 거짓된 신화와 환상이 있다.
교도소에 갇혀 시키는대로만 살다가 사면되어 나온 장기수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심지어 수퍼마켓에서 일을 하다가도 화장실에 갈 때면 꼭 주인의 허락을 받으려 했던 쇼생크 탈출의 그 목맨 노인처럼) - 자유로부터 끝없이 도피해온 우리 민족은 이제 자신 앞에 다가오는 자유의 권리를 스스로 외면하며 공포감에 빠진 채 도피하지 말고 당당한 축복과 자부심으로 누려살아갈 수 있는 자유에의 적극적인 용기, 존재에의 당찬 발걸음이 필요하다.
물론 너무 급작스런 변화와 지난 반세기를 다져온 한미 관계의 급작스런 불균형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가져다주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지금의 부풀려진 경제위기론처럼 수구 언론의 그 위악적인 과장과 호들갑만 아니라면 현명한 우리 국민들은 충분히 차분하고 냉철한 이성에 기반하여 변화의 흐름을 안정적으로 잡아가겠지만 아직은 친일-친미의 호전적인 냉전수구세력들이 벌이는 거짓 선전전과 여론전략 또한 가볍지않게 국론을 분열시켜가는 과정이므로 보다 긴 호흡과 여유를 지닌 섬세한 과정 이해와 현실 파악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중세 마녀재판 수준 이하의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현실을 용인하면서 현실은 무지의 나락의 빠뜨리는 데 일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허위의 탈을 쓴 90년대의 포스트모던을 지나 계몽적이며 창조적인 - 움베르트 에코는 ‘돌아온’이라 표현한 지금의 새로운 중세를 나는 계몽을 동반한 창조성이라 믿는다 - 중세를 맞이하는 21세기의 새시기를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준비하자. 그건 개혁을 표방하는 어느 세력에게 기댈 것 없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주체적인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
석유패권과 달러화 수호를 위해 이라크에서 추악한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구역질나는 본질은 - 그것이 자본이든 군사력이든 - 더 이상 이해와 동정의 여지를 구할 수 없는 도덕적 치부를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주었다.
한국전쟁 끝물에서, 핵사용을 불사하려던 맥아더의 호전적 전략판단이 뒷걸음치고 결국 굴복으로 휴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이승만의 무지몽매가 한미- 혹은 한미일 -동맹이라는 거짓 계몽과 신화 속에서 한국민을 노예로 만들고 -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만취해서 한국시민을 흉기로 찌를 미군의 희희낙락하는 오만방자는 계속된다 - 파블로프의 개처럼 한미동맹만을 절대 신조로 숭앙하도록 길들여왔다.
이제 감전의 상황은 끝났는데도, 앞선 원숭이들이 감전사한 공포의 기억 때문에 과감히 철조망을 넘지 못하는 후배 원숭이들의 슬픈 역사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된다. 마지막 몸부림으로, 보수적인 노무현 정부까지를 친북좌파로 몰아붙이는 조갑제나 김대중의 처절함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제 친일에서 친미까지 외세에 기생하며 온갖 권력과 자본의 특혜를 누려온 소위 수구의 몸부림은 그 종착역을 향해서 마지막 경적을 울리고 있다.
시대를 꿰뚫어보는 특별한 혜안이 아니라 하더라도, 21세기 한국역사를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이나 사상 원리를 잘 모르는 무지랭이 촌부나 공장일꾼이라도 이제 무엇이 정의이고 힘이며 누가 악이고 선인가를 알만큼 이 시대는 또 다른 계몽의 사다리를 타고 새로운 역사창조의 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2002년의 월드컵을 통해 불타오른 참여문화의 불길은 -그것을 수구 세력들은 온갖 포퓰리즘으로 폄하하려고 기를 씀에도 불구하고 -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대세이자 역사의 법칙으로 뚜벅뚜벅 그 길을 당차게 걸어가고 있다. 효순 미선의 고통에 동참한 촛불시위가 탄핵기각과 이라크 파병 철회를 요구하는 시민의 힘으로 결집되는 이 순간까지의 지난 역사가 이를 온몸으로 증명하지 않는가!
우리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일제찌꺼기의 독소를 스스로 정화하지 못한 채 - 미국의 패권 앞에 한없이 초라한 종속의 길을 걸어왔으면서도 이주 노동자 억압을 예로 보듯이 국가든 개인이든 약자에게는 서구의 흰 가면을 쓴 사실도 망각한 채, 스스로 강해지려는 패권이데올로기를 휘두르려는 - 미국의 강한 힘 앞에서 무릎을 펼 줄 모르고 살아왔다.
시장에서, 군대에서, 극장에서, 심지어 교실에서조차 미국-자본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와 남근적 권위 앞에서 고개를 숙여왔다. 그리고 그 모든 체계의 정점에 한-미 동맹의 거짓된 신화와 환상이 있다.
교도소에 갇혀 시키는대로만 살다가 사면되어 나온 장기수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심지어 수퍼마켓에서 일을 하다가도 화장실에 갈 때면 꼭 주인의 허락을 받으려 했던 쇼생크 탈출의 그 목맨 노인처럼) - 자유로부터 끝없이 도피해온 우리 민족은 이제 자신 앞에 다가오는 자유의 권리를 스스로 외면하며 공포감에 빠진 채 도피하지 말고 당당한 축복과 자부심으로 누려살아갈 수 있는 자유에의 적극적인 용기, 존재에의 당찬 발걸음이 필요하다.
물론 너무 급작스런 변화와 지난 반세기를 다져온 한미 관계의 급작스런 불균형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가져다주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지금의 부풀려진 경제위기론처럼 수구 언론의 그 위악적인 과장과 호들갑만 아니라면 현명한 우리 국민들은 충분히 차분하고 냉철한 이성에 기반하여 변화의 흐름을 안정적으로 잡아가겠지만 아직은 친일-친미의 호전적인 냉전수구세력들이 벌이는 거짓 선전전과 여론전략 또한 가볍지않게 국론을 분열시켜가는 과정이므로 보다 긴 호흡과 여유를 지닌 섬세한 과정 이해와 현실 파악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중세 마녀재판 수준 이하의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현실을 용인하면서 현실은 무지의 나락의 빠뜨리는 데 일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허위의 탈을 쓴 90년대의 포스트모던을 지나 계몽적이며 창조적인 - 움베르트 에코는 ‘돌아온’이라 표현한 지금의 새로운 중세를 나는 계몽을 동반한 창조성이라 믿는다 - 중세를 맞이하는 21세기의 새시기를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준비하자. 그건 개혁을 표방하는 어느 세력에게 기댈 것 없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주체적인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