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 루즈의 인민 대학살에 대한 촘스키의 위선

by 民主 posted Jul 30, 2004

크메르 루즈의 인민 대학살에 대한 촘스키의 위선

1975년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를 점령하게 되자 촘스키와 신좌파들은 이를 환영하였다. 그리고 프놈펜 시민들에 대규모 추방 사태와 함께 집단 학살에 대한 보도들이 나왔을 때 촘스키는 중국과 베트남의 테러를 옹호했던 것과 비슷한 논리로 캄보디아의 학살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즉 여기에는 다소의 폭력이 있었으나 이는 정권의 교체와 사회 혁명이라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폭력이었다는 논리이다.

정보를 얻는 것이 매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촘스키는 1977년의 한 기사 글에서 전쟁후의 캄보디아는 아마도 수천의 이적행위자들이 몇 달 내에 학살되었던 2차 세계대전 말의 자유 프랑스와 비슷할 거라고 적고 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폴 포트 정부의 확실한 성공을 위한 최소한의 대가라고 말했다. 촘스키는 두 명의 미국 좌파 작가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와 죠지 힐드브랜드(George Hildebrand)가 캄보디아 혁명가들의 프로그램과 정책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인 사진들과 함께 캄보디아에 대한 미국의 폭력 행사와 이를 극복한 캄보디아 혁명가들의 성공에 대하여 주의 있게 기록하여 출판하였던 책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 캄보디아에 대해 매우 다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또 다른 두 권의 책이 있었다. 미국인 작가 존 바론(John Barron)과 앤서니 폴(Anthony Paul)의 “온화한 땅의 대학살(Murder of a Gentle Land)”에서 폴 포트 정권의 집단 대량 학살을 고발하였다. 또한 프랑코스 폰차우드의 “캄보디아 종말의 해(Cambodia Year Zero)” 역시 같은 맥락으로 비난하고 있다.

촘스키는 1977년 네이션(The Nation) 6월호에서 이 두 책과 다른 언론들의 기사에 대하여 함께 비판하였다. 그는 이 두 책들은 반공주의 선전에 불과한 작품일 뿐이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뉴욕타임즈 잡지와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도 캄보디아의 총 사망자 수는 7백 80만의 총 인구 중 백만에서 이백만 사이에 이른다고 썼다. 촘스키는 이에 대해서도 총 사망자수의 통계는 의심스러우며 캄보디아의 강제 노동 수용소 사진들에 대해서도 조작이라고 조롱하였다.

촘스키가 바론과 폴의 책을 단순 무시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 두 책들이 리더스 다이제스트 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또 월스트리트 저널 일면에 게재되었는 데 리더스 다이제스트와 월 스트리트 저널은 당시 반공주의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 두 언론사들은 캄보디아에 갔었지만 어떤 강제적 학살도 목격하지 못했던 다른 언론인들의 의견들은 게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폰차우드의 책은 무시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이 책은 1965년부터 프놈펜 점령까지 캄보디아에 머물렀던 작가의 경험과 피난민들과의 광범위한 인터뷰, 그리고 캄보디아 라디오의 보도들을 기초로 하여 쓰여졌고, 더 나아가 자주 촘스키의 글을 실어 왔던 ‘The New York Review of Books’의 한 좌파 작가에 의해 호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촘스키의 전략은 피난민들 증언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폰차우드의 책을 깎아 내리는 것이었다. 촘스키는 폰차우드가 ‘크메르 루즈에 의해 자행된 야만행위에 대한 끔찍한 증언들을 잘 묘사하고 있지만’, 우리는 ‘증언의 진실성’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난민들은 공포에 질려 있고, 외부 세력에 대해 무방비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질문자가 무엇을 듣기를 원하는가를 생각하며 증언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난민들의 증언들을 통해 한 사회의 객관적 현실을 판단하려고 할 때는 그 증언들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특히, 서구인들과 태국인들이 인터뷰한 난민들은 캄보디아의 기득권층이었기 때문에 캄보디아 혁명가들에 의해 자행된 잔혹상에 대해 과장되게 증언할 동기가 충분히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진지하지 못한 기자들은 종종 이런 점들을 간과한다. ”

촘스키는 그의 이런 비판을 1980년, 그와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에드워드 헤르만(Edward S. Herman) 과의 공동 저서 ‘대변동 이후(After the Cataclysm)’에까지 연장하여 전개하였다. 그리고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관한 내용 대부분은 폴 포트 정권을 옹호하였던 촘스키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채워졌다. 그 당시, 촘스키는 뭔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캄보디아에서의 잔학한 기록은 사실이고 매우 소름끼치는 일”이며, “전쟁은 폭력과 학살, 억압 등을 동반한다는 것에 의혹은 있을 수 없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망자의 수가 백만 명을 넘는다는 의견은 무시하였으며,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의 ‘대량 학살’의 중지를 위한 군사적 개입 요구에 대해서는 비난하였다.

반면, 촘스키는 폴 포트 정권을 옹호했었던 작가들을 칭송하였다. 그는 프놈펜으로부터 국민들을 강제 추방한 것은 1976년 쌀 생산량의 극감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는 폴 포트 옹호 작가들의 분석을 전적으로 인용하였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당시 그리고 폴 포트 정권의 분명한 학살 이후 폭넓게 비난 받았던 프놈펜 철수는 사실 많은 인명을 구한 것이다”라고 촘스키는 서술하고 있다. 또한 촘스키는 크메르 루즈의 대량 학살 책임을 부인하였다.

“캄보디아인의 죽음은 정부의 계획적인 학살과 의도된 아사의 결과가 아니었으며, 농민들의 복수극,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훈련받지 못한 군대들의 만행이다. 또 굶주림과 질병은 미국의 전쟁과 같은 요인들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또한 ‘대변동 이후’는 난민들의 증언을 폭넓게 비판하였다. 촘스키는 그 책에서 1977년 저술의 자료 출처는 벤 키르난(Ben Kiernan)이라고 밝혔다. 벤 키르난은 당시 호주 대학원생으로 폴 포트 정권을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며 모택동주의 잡지였던 “Melbourne Journal of Politics”에 글을 기고했었다. 그러나 촘스키가 그의 독자들에게 말하기를 꺼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대변동 이후’가 출판되던 해인 1980년 이전부터 잘 알려진 것이었다. 바로 벤 키르난 자신이 자신의 주장을 이미 철회하였다는 것이다.  

키르난은 1978에서 1979년 사이, 태국의 난민촌에서 5백 명의 캄보디아 난민들과 인터뷰를 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 캄보디아 난민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진실을 말하고 있다며 키르난을 설득하였다. 그는 친베트남 캄보디아 정부의 집권 후 당시 크메르 루즈의 학살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증거들은 1979년 'Concerned Asian Scholars'의 기관지에 '나의 실수'라는 글을 쓰게 만들었다. 이 잡지는 촘스키가 자주 이용했던 좌파 잡지였으며, 키르난이 '폴 포트가 지도한 혁명운동의 광신적 애국주의는 국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으며 이들 폭력의 명확한 증거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변동 이후'에서 촘스키는 여전히 이런 사실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키르난은 후에 폴 포트 정권에 관한 집필을 하기 위해 캄보디아를 방문하였다. 1975-1979년 사이 크메르 루즈 정권하의 사회상, 권력, 대량학살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이 책(The Pot Pot Regime: Race, Power and Genocide under the Khmer Rouge 1975~9)은 현재, 기록된 역사 중 가장 악랄했던 사건 중 하나를 분석한 결정판으로 간주되고 있다. 1975년 프놈펜의 강제 추방 과정에서 수만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공무원들, 선생님들, 지식인들 그리고 예술가들과 같은 중간계층 대부분이 이유 없는 목표가 되었고, 살해당했다. 최소 68,000에서 최고 70,000의 스님들이 처형되었으며, 도시에 살고 있던 50%의 중국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키르난은 1975년 4월부터 크메르 루즈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베트남의 침공이 있었던 1979년 1월 사이의 총 사망자 수가 전체 인구 789만명 중 167만명 즉 전체 인구의 21%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는 현대사 아니 인류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 정권이 자국민에게 저지른 최대의 대량 학살이다.

촘스키는 크메르 루즈 정권의 최고 명망성있고 끈질긴 대변인이었다. 진실을 이야기 하기엔 너무 늦어 버린 1988년, 촘스키와 헤르만은 그들의 공동저서 'Manufacturing Consent'를 통해 폴 포트가 자국민을 대량학살 했음을 시인할 때마저도, 이들은 그 대량 학살을 최초로 보도했던 언론인들과 작가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옳은 것이었다고 고집하였다. 1979년 베트남의 크메르 루즈 축출 이후 드러난 증거들은 1977년 이들이 혹평하였던 보고서들을 정당화시켜주지 않는다고 또 억지를 부린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 주장의 시작이자 전부였던 ‘비난받아야 할 주 대상은 미국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완강히 버티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촘스키는 여전히 캄보디아에 대해 저지른 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