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이형이 정리한 내용을 보고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그냥 편하게 두서없이 얘기한 것들을
그렇게까지 속속들이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그때 녹음기가 있었나?
하여간 편하게 진행한 방담의 자리에서 농담조를 섞어서 한 얘기가
여과없이 정리되어 그대로 이해하기에는 위험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사족을 달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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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인화에 있어서 고졸 혹은 졸박함에 대하여
동양의 옛사람들은 그림을 그릴때 대상의 외형적 형상에 대한 의식적 집중보다 대상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통해 형상을 해체하여 그 내재적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양화에서는 사(思)라는 개념이 중요한데 그 개념을 살펴보면, 사는 대상의 핵심만을 간추려서 작가의 상상력을 집중시켜 대상의 특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思)란 대상에서 보이는 것을 모두 표현하려고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대요만 간추리고,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대상이 그것이 되는 특질, 가장 진실한 면목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대상의 실존적 형상이란 의식적으로 시간이 정지된 한순간을 가정할 때나 가능한 것이어서 그것을 통해 천변만화하는 대상의 내재적 본질을 구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완물의 취미로까지 확대 되는데 오래된 물건들이 주는 낡고 닳은 느낌이 그 물건이 가진 외형의 겉치레를 털어내고 그 것의 본연을 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유가와 도가의 이념적 세례를 받았던 사대부문인들에 의해 특히 선호되었는데 이것은 화려한 것을 삼가하고 청빈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던 그들의 사상적 태도와 부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2. 그림에 있어 생명의식
‘생명’이란 살아있는 생명체 혹은 스스로 운행 작용하는, 살아 움직이는 운동성, 즉 성장(成長) 그 자체를 뜻합니다. 옛 사람들은 살아있는 모든 만물은 단일한 요소와 구조에 의해 생명을 이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氣)인데, 기의 가장 단순한 의미는 봄날 강가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또는, 사람의 호흡을 이르는 말로 장자(莊子)는 이것을 ‘아지랑이’(野馬)와 ‘먼지’(塵埃)로 설명합니다. 생물이 들이키고 내쉬는 호흡이란 마치 봄날 대지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먼지처럼 미세한 대지의 정화를 흡입하는 것으로 이러한 작용을 통해 만물은 생명을 유지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는 호흡 안에 내재해 있는 생명과 정신 형성의 주된 근원이 됩니다. 또 기가 생명을 이루는 기초라는 생각은 더 나아가 생명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원동력, 또는 생명체의 구조를 이루는 기본요소로 파악되었으며 기의 운행에 의해 만물이 형성되고 소멸한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기는 또 예술의 창작과 감상에 있어서 작품 평가의 중요한 준거가 되었는데,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때 ‘기운’(氣韻)은 대상의 생명현상을 이르는 것입니다. ‘기운’(氣韻)이란 대상의 기질과 기세 등, 대상의 특징을 포함한 말로 대상의 총제적인 존재가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술론에 적용되어 심미(審美)적인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특히 그림에서의 기는 대상의 진실한 모습을 얻거나 또는 피상적인 모양만 흉내를 내는 그림(眞假)의 판단기준이 되며, 그림이 생기를 얻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관건이 됩니다. 오대(五代)의 형호(荊浩)는 “비슷하다(似)는 것은 그 형체는 얻었지만, 그 기를 잃은 것이요, 참됨(眞)이라는 것은 기질이 모두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似者, 得其形, 遺其氣, 眞者, 氣質俱盛”) 라고 말합니다. 대상의 형체를 아무리 잘 묘사한다고 한들 대상의 특질인 ‘기’를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 그림은 생기를 잃은 죽은 그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예술의 진정한 요소란 ‘생명’에 있다고 간주한 것입니다. 동양의 전통에서 그림은 생명의 체현으로 예술과 도가 분리되지 않은 경계를 표현하려고 하였고, 생명을 예술적인 감수성의 근원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새가 날고 물고기가 뛰고 꽃이 피고 지며, 해가 뜨고 달이 떨어지는 모든 것을 생명활동으로 보고, 이러한 이치를 화면에 담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의 전통적인 사유체계에서 ‘생명’은 모든 물상존재의 근본이며 가장 궁극적인 진(眞)이고, 동시에 모든 인간질서의 도덕 이성이 모두 여기에 근거하는 최고의 선(善)이며, 또 인간세의 모든 아름다움이 생명의 드러냄이 아닌 것이 없는 지고의 미(美)의 현현(顯現)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진선미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 됩니다.
투시법이나 빛, 그림자 등을 중요시하지 않고 오직 대상의 생동하는 리듬의 표현과 ‘전신(傳神)’에서 그림의 성패를 가름하는 듯한 것도 사실은 동양의 그림이 추구하는 경계가 생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면 이러한 의식은 사실 자연의 시의화(詩意化)에 불과 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주관적 인식이 부여한 의미라는 뜻이죠.
3. 동양화의 핵심, 선
흔히 동양화를 ‘선의 예술’이라고 합니다. 그림을 일컫는 한자어인 ‘회화(繪畵)’는 ‘칠한다’라는 뜻의 ‘회’와 ‘긋는다’라는 뜻의 ‘화’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동양의 전통적인 인식 속에서 그림은 면적인 형식보다 선적인 형식이 만들어내는 사상이나 정감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더 중시되었습니다. 형호(荊浩)는 『필법기(筆法記)』에서 “그림이란 긋는 것이다(畵者畵也).”라고 말하였고, 명말 청초의 화가이자 이론가였던 석도(石濤)는 그림에 관한 이론적 근거로 ‘일획론(一畵論)’을 내세웁니다.
그림에서 선 중심적 표현방식은 세계(世界, 즉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 중 시간을 중시하는 사유방식에서 연유합니다. 중국 근대의 미학자 종백화(宗白華)는 중국회화의 선 중시 사유를 근거로 전통적인 중국 그림을 “시간이 공간을 주도하는” 회화라고 특징지어 말하고, 이것은 단지 그림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중국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공간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모든 만물의 변화는 시간과 더불어 형성됩니다. 시간은 변화를 동반합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상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결국 인간의 인식 역시 변화하는 사물을 쫒아 매 순간 변화해 갈 수밖에 없다는 사유로 나아갑니다. 『주역(周易)』에서 ‘도(道)’는 자연의 법칙이자 대상의 영원한 생명력을 일컫는데, ‘역(易)’의 원리란 곧 변화의 원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역’의 사유구조 안에서 대상에 대한 인식은 시간의 추이 속에서 부단히 변하는 것입니다. 인식이란 부단히 변화하는 주체와 부단히 변화하는 대상 사이에 일어나는 정신적 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식 역시 시간의 영원한 흐름 속에서 부단히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실재는 부단히 변화하는 ‘인식’ 안에서 끝없이 변화하는 모습으로 남게 되는데, 이것을 불교의 “공(空)”의 개념으로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대상의 변화와 같이 표현 안에서도 시간의 변화를 구현하는 것으로서 선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대상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로써 선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의 형상도 고정화된 실체가 아니라고 할 때, 마음속의 형상 역시 시간의 변화와 함께 변화하는 것입니다. 동양회화의 선적 특징은 선을 통해 이러한 마음속 형상의 변화가 손과 붓을 거쳐 여과 없이 투영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선적인 표현양식은 직관적입니다.
인식적 방법론인 ‘역’의 사유체계 역시 논리적 사고가 끼어들 틈이 없는 직관적인 것이지만, 선적인 표현양식 역시 논리적 사고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선의 변화에 주체의 대상에 대한 감정의 폭이 여과 없이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변화하는 대상의 시간적 현실성은 구체적으로 선의 농담의 변화와 건습, 완급, 압찰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죠.
그러나 대상의 표현에 있어서 무상하게 흘러가버리는 그래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에 대한 흐름의 선적 인식만으로 대상의 진실성이나 작품의 진정한 가치가 담보되지는 않습니다. 작품이 예술적 승화를 거쳐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끝없이 무상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의 가치를 발견하고 표현해야 합니다. 동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에서 직관적 인식은 ‘현재’성을 강조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진실하고, 참입니다. 지나가 버린 시간이나 미래의 시간은 진실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야말로 창조의 시작입니다. 그 현재의 한 찰라, 그 순간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는 미래로 가는 길인 영원과 만나고, 다른 한편으로 이미 없는 과거로 가는 길로서 영원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순간’이 영원의 변화에 조응하는 것은 작가의 심적 상태입니다. 순간 속에서의 영원을 작품에 표현하기 위해, 동양회화에서는 ‘세(勢)’라는 개념을 제기합니다.
‘기세(氣勢)’로 표현되는 동적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이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세’는 자연의 경계와 예술 경계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척지간에 천리만리의 기세가 있다” 라거나, “지척의 화폭이 천지산천의 만물을 포괄할” 수 있는 것, 즉 인공으로 창작된 자연이 자연본연의 모습처럼 여겨지는 느낌은 ‘세’의 작용이며, ‘세’의 구체적인 작용이란 자연의 시간적 변화와 함께 그에 조응하는 생명의 지향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세’란 천지 자연변화의 생명현상을 포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화가는 화면에 구현된 ‘세’를 통하여 창작의 진실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동양회화에서 선은 결국 표현형식에 있어서 대상의 진실성을 확보하려는 장치입니다. 직관으로 인식되는 세계에 대한 직관적 표현의 방법으로써 선은 동양회화의 중요한 전통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편하게 두서없이 얘기한 것들을
그렇게까지 속속들이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그때 녹음기가 있었나?
하여간 편하게 진행한 방담의 자리에서 농담조를 섞어서 한 얘기가
여과없이 정리되어 그대로 이해하기에는 위험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사족을 달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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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인화에 있어서 고졸 혹은 졸박함에 대하여
동양의 옛사람들은 그림을 그릴때 대상의 외형적 형상에 대한 의식적 집중보다 대상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통해 형상을 해체하여 그 내재적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양화에서는 사(思)라는 개념이 중요한데 그 개념을 살펴보면, 사는 대상의 핵심만을 간추려서 작가의 상상력을 집중시켜 대상의 특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思)란 대상에서 보이는 것을 모두 표현하려고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대요만 간추리고,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대상이 그것이 되는 특질, 가장 진실한 면목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대상의 실존적 형상이란 의식적으로 시간이 정지된 한순간을 가정할 때나 가능한 것이어서 그것을 통해 천변만화하는 대상의 내재적 본질을 구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완물의 취미로까지 확대 되는데 오래된 물건들이 주는 낡고 닳은 느낌이 그 물건이 가진 외형의 겉치레를 털어내고 그 것의 본연을 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유가와 도가의 이념적 세례를 받았던 사대부문인들에 의해 특히 선호되었는데 이것은 화려한 것을 삼가하고 청빈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던 그들의 사상적 태도와 부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2. 그림에 있어 생명의식
‘생명’이란 살아있는 생명체 혹은 스스로 운행 작용하는, 살아 움직이는 운동성, 즉 성장(成長) 그 자체를 뜻합니다. 옛 사람들은 살아있는 모든 만물은 단일한 요소와 구조에 의해 생명을 이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氣)인데, 기의 가장 단순한 의미는 봄날 강가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또는, 사람의 호흡을 이르는 말로 장자(莊子)는 이것을 ‘아지랑이’(野馬)와 ‘먼지’(塵埃)로 설명합니다. 생물이 들이키고 내쉬는 호흡이란 마치 봄날 대지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먼지처럼 미세한 대지의 정화를 흡입하는 것으로 이러한 작용을 통해 만물은 생명을 유지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는 호흡 안에 내재해 있는 생명과 정신 형성의 주된 근원이 됩니다. 또 기가 생명을 이루는 기초라는 생각은 더 나아가 생명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원동력, 또는 생명체의 구조를 이루는 기본요소로 파악되었으며 기의 운행에 의해 만물이 형성되고 소멸한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기는 또 예술의 창작과 감상에 있어서 작품 평가의 중요한 준거가 되었는데,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때 ‘기운’(氣韻)은 대상의 생명현상을 이르는 것입니다. ‘기운’(氣韻)이란 대상의 기질과 기세 등, 대상의 특징을 포함한 말로 대상의 총제적인 존재가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술론에 적용되어 심미(審美)적인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특히 그림에서의 기는 대상의 진실한 모습을 얻거나 또는 피상적인 모양만 흉내를 내는 그림(眞假)의 판단기준이 되며, 그림이 생기를 얻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관건이 됩니다. 오대(五代)의 형호(荊浩)는 “비슷하다(似)는 것은 그 형체는 얻었지만, 그 기를 잃은 것이요, 참됨(眞)이라는 것은 기질이 모두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似者, 得其形, 遺其氣, 眞者, 氣質俱盛”) 라고 말합니다. 대상의 형체를 아무리 잘 묘사한다고 한들 대상의 특질인 ‘기’를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 그림은 생기를 잃은 죽은 그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예술의 진정한 요소란 ‘생명’에 있다고 간주한 것입니다. 동양의 전통에서 그림은 생명의 체현으로 예술과 도가 분리되지 않은 경계를 표현하려고 하였고, 생명을 예술적인 감수성의 근원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새가 날고 물고기가 뛰고 꽃이 피고 지며, 해가 뜨고 달이 떨어지는 모든 것을 생명활동으로 보고, 이러한 이치를 화면에 담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의 전통적인 사유체계에서 ‘생명’은 모든 물상존재의 근본이며 가장 궁극적인 진(眞)이고, 동시에 모든 인간질서의 도덕 이성이 모두 여기에 근거하는 최고의 선(善)이며, 또 인간세의 모든 아름다움이 생명의 드러냄이 아닌 것이 없는 지고의 미(美)의 현현(顯現)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진선미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 됩니다.
투시법이나 빛, 그림자 등을 중요시하지 않고 오직 대상의 생동하는 리듬의 표현과 ‘전신(傳神)’에서 그림의 성패를 가름하는 듯한 것도 사실은 동양의 그림이 추구하는 경계가 생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면 이러한 의식은 사실 자연의 시의화(詩意化)에 불과 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주관적 인식이 부여한 의미라는 뜻이죠.
3. 동양화의 핵심, 선
흔히 동양화를 ‘선의 예술’이라고 합니다. 그림을 일컫는 한자어인 ‘회화(繪畵)’는 ‘칠한다’라는 뜻의 ‘회’와 ‘긋는다’라는 뜻의 ‘화’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동양의 전통적인 인식 속에서 그림은 면적인 형식보다 선적인 형식이 만들어내는 사상이나 정감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더 중시되었습니다. 형호(荊浩)는 『필법기(筆法記)』에서 “그림이란 긋는 것이다(畵者畵也).”라고 말하였고, 명말 청초의 화가이자 이론가였던 석도(石濤)는 그림에 관한 이론적 근거로 ‘일획론(一畵論)’을 내세웁니다.
그림에서 선 중심적 표현방식은 세계(世界, 즉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 중 시간을 중시하는 사유방식에서 연유합니다. 중국 근대의 미학자 종백화(宗白華)는 중국회화의 선 중시 사유를 근거로 전통적인 중국 그림을 “시간이 공간을 주도하는” 회화라고 특징지어 말하고, 이것은 단지 그림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중국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공간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모든 만물의 변화는 시간과 더불어 형성됩니다. 시간은 변화를 동반합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상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결국 인간의 인식 역시 변화하는 사물을 쫒아 매 순간 변화해 갈 수밖에 없다는 사유로 나아갑니다. 『주역(周易)』에서 ‘도(道)’는 자연의 법칙이자 대상의 영원한 생명력을 일컫는데, ‘역(易)’의 원리란 곧 변화의 원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역’의 사유구조 안에서 대상에 대한 인식은 시간의 추이 속에서 부단히 변하는 것입니다. 인식이란 부단히 변화하는 주체와 부단히 변화하는 대상 사이에 일어나는 정신적 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식 역시 시간의 영원한 흐름 속에서 부단히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실재는 부단히 변화하는 ‘인식’ 안에서 끝없이 변화하는 모습으로 남게 되는데, 이것을 불교의 “공(空)”의 개념으로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대상의 변화와 같이 표현 안에서도 시간의 변화를 구현하는 것으로서 선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대상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로써 선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의 형상도 고정화된 실체가 아니라고 할 때, 마음속의 형상 역시 시간의 변화와 함께 변화하는 것입니다. 동양회화의 선적 특징은 선을 통해 이러한 마음속 형상의 변화가 손과 붓을 거쳐 여과 없이 투영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선적인 표현양식은 직관적입니다.
인식적 방법론인 ‘역’의 사유체계 역시 논리적 사고가 끼어들 틈이 없는 직관적인 것이지만, 선적인 표현양식 역시 논리적 사고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선의 변화에 주체의 대상에 대한 감정의 폭이 여과 없이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변화하는 대상의 시간적 현실성은 구체적으로 선의 농담의 변화와 건습, 완급, 압찰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죠.
그러나 대상의 표현에 있어서 무상하게 흘러가버리는 그래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에 대한 흐름의 선적 인식만으로 대상의 진실성이나 작품의 진정한 가치가 담보되지는 않습니다. 작품이 예술적 승화를 거쳐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끝없이 무상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의 가치를 발견하고 표현해야 합니다. 동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에서 직관적 인식은 ‘현재’성을 강조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진실하고, 참입니다. 지나가 버린 시간이나 미래의 시간은 진실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야말로 창조의 시작입니다. 그 현재의 한 찰라, 그 순간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는 미래로 가는 길인 영원과 만나고, 다른 한편으로 이미 없는 과거로 가는 길로서 영원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순간’이 영원의 변화에 조응하는 것은 작가의 심적 상태입니다. 순간 속에서의 영원을 작품에 표현하기 위해, 동양회화에서는 ‘세(勢)’라는 개념을 제기합니다.
‘기세(氣勢)’로 표현되는 동적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이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세’는 자연의 경계와 예술 경계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척지간에 천리만리의 기세가 있다” 라거나, “지척의 화폭이 천지산천의 만물을 포괄할” 수 있는 것, 즉 인공으로 창작된 자연이 자연본연의 모습처럼 여겨지는 느낌은 ‘세’의 작용이며, ‘세’의 구체적인 작용이란 자연의 시간적 변화와 함께 그에 조응하는 생명의 지향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세’란 천지 자연변화의 생명현상을 포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화가는 화면에 구현된 ‘세’를 통하여 창작의 진실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동양회화에서 선은 결국 표현형식에 있어서 대상의 진실성을 확보하려는 장치입니다. 직관으로 인식되는 세계에 대한 직관적 표현의 방법으로써 선은 동양회화의 중요한 전통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