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차 화요마당- 사라진 현장과 여전한 현장

by KG posted Oct 2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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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04년 9월 21일 (화) 저녁 7:30
장소 : KG 대회의실
주제: 사라진 現場과 여전한 現場
초청회원 : 김호철 노동의 소리 대표(노동가요 작곡가)
참석인 : (8인)강성용, 김석규,박소희, 이강일, 이주원, 임윤옥, 정창수, 박종화
         뒷풀이 참석 : (4인)배덕호, 손동주, 손종도, 염동하

이 나라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제 고민이 코리아글로브에 녹아났으면 합니다.

  저는 노동가요를 작곡하는 노래를 만드는 사람이지 노동운동가는 아닙니다.  그래서 늘 한시대 노동운동과 함께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표현하고, 같이 일하는 문화일꾼들과 함께 제대로 된 문예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떼어놓을 수 없듯이 항상 가까이 하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오늘은 그 현장에서 느꼈던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87~89년의 뿌듯함
  지하철 노동조합이 1987년 7·8·9 투쟁이 끝나고 나서 임금이 2배(100%)올랐습니다.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이 나를 보호해주기도 하고 생계도 챙겨주고, 이런 저런 관리자들의 폭언 등을 싸움을 통해서 노동조합을 통해서 해결하고 노동자들이 뭉쳤더니 그들에게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이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느낌이었습니다.
  1987년을 근래 노동운동의 시작으로 본다면 그때 당시 노동자들의 마음에 아주 크게 느낌이 와 닿았던 대목입니다. 노동자들 대부분이 시골에서 중·고등학교 졸업하고 밥값을 하러 올라와서 스스로를 스페어로 생각하거나 돈을 벌어도 그만, 해고되어도 다른 곳에 가서 일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하니 해고당하더라도 반항을 하겠습니까?  그러다가 사회변혁이라는 인텔리운동으로 시작된 이념들이 노동현장으로 많이 급격히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85년도 구로연투를 많이 말씀 하시는데 구로연투는 인텔리 활동가들, 준비된 사람들의 싸움이었지 대중과 함께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책에만 쓰인 것입니다.  
  84~85년의 구로지역과 인천지역의 활동가들이 현장에 소위 위장취업으로 들어가 있으면서 많은 일을 해냈고, 조직활동을 해냈고 그 결과가 87년 투쟁이었다는 데에는 절대 반대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85년이 없었다고 87년의 투쟁이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87년 7.8.9 투쟁은 이미 진행 중이었습니다.  대신 상비군처럼 있어야 될 동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분들이 85~87년 봄에 해고되었던 노동자들이고 해고된 노동자들의 1/3 가량은 인텔리 활동가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집회에서 노동자의 깃발을 들고 나타난  것은 사실 현장에 존재하는 노동자 그룹은 없었고, 주로 언더에서 활동하던 노동운동조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87년에 데모를 하다가 감옥 가고 88년도에 나와서 노동운동이 격하게 벌어졌던 울산에 갔다 왔습니다.  거의 군대조직 같았습니다.  구로 공단에서는 300~400명이면 대사업장이고, 1,500명 사업장이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좌우할 정도로 큰 사업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울산에 가봤더니 위원장이 지나가면 덩치 좋은 사람들이 호위하고, 위원장 얼굴한번 보기 힘들고, 초대해서 봐도 몇 마디 안합니다.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그 이후에 권력집단을 부수고 권력을 쟁취해야된다는 사상을 가지던 시기라 그런지, 그들이 우악스럽고 상당히 고집스럽고 완장주의 같은 관료주의를 보임에도 마치 오른쪽으로 꺾어진 것을 다시 왼쪽으로 꺾어놓는다는 표현대로 이렇게 해야된다는 식으로 많이 동의를 했습니다.  부산 한진중공업, 거제도 몇 군데를 돌아봤는데 다 분위기는 비슷했고, 정말 뿌듯한 마음으로 88, 89년도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노동운동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 머릿속에 씨앗으로 싹트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9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의 변질
  “지금의 노동현장이 옛날 노동현장 같지는 않다.”  지금의 노동운동은 밥그릇 싸움이라는데 사실 맞는 말입니다.
87년~ 90년까지 노동운동 하던 사람들은 임단협으로 감옥가도 민주화운동 차원으로 보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임금 조금 더 올리려고 싸웠다고 구속된 것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악스럽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던 노동자들을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힘을 믿었고 그 힘으로 정말 이 사회가 똑바로 가는 데 보탬이 되고 정치적 힘이 되었으면 좋겠고, 악법 개폐라든가 제도개편, 비정규직 문제를 푸는 데 힘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당시에 만들던 대부분 노래들은 그런 노래들이었고 그 힘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90년대 중반 자동차 4사 싸움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서울에서 투쟁을 한다면 공공부문이나 자동차, 한국통신 이런데서 먼저 싸움을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민주노총에서는 그 투쟁사업장을 중심으로 그 해의 싸움 계획을 잡습니다.  미리 준비되고 어떤 이슈를 가지고 싸워야 되겠다가 아니라 각 단위사업장의 임단협, 임금싸움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합니다.  거기에 정치적 논리는 자기 이익대로 갑니다.  

  지하철 같은 경우는 민중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중산층 이하에서 많이 이용하는 수단인데 지하철을 멈추고 어떤 투쟁을 한다는 자체가 결국은 파업투쟁의 피해자가 노동자들의 식구들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다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이런 생각했습니다.  지하철의 미세먼지는 엄청나게 심각합니다.  이 미세먼지에 대해서는 아예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  지하철 내 미세먼지를 흡수하는 기관차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기계가 돌아다니다 보면 미세먼지가 없다고 합니다.  기계가 다 엉터리고 여과장치도 엉터리고, 그런데 수치를 재어 보면 엄청나고, 이 미세먼지는 한번 몸에 들어가면 폐암 등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것으로 싸우자, 병원에서 파업하면 환자들이 제일 고생을 할텐데, 환자들에게 의료진이 서비스를 잘 해주도록, 식당 밥이 잘 나오도록 이런 서비스관리를 가지고 싸우면서 임금도 같이 싸워야 됩니다.  이것이 노동운동의 작은 정의가 아니냐, 이런 것을 그때 많이 고민 했습니다.  무임승차 투쟁이니 이런 것이 하나의 결과물입니다.  노동자들이 독한 마음으로 ‘한판 붙어봐’ 이런 사람들은 없습니다.  

  2000년에 ‘사회주의는 가고’라는 노래를 만들었는데, 반응이 여러 가지였습니다.  
적어도 제가 공부했고 80~90년대 살아오면서 꿈꿔왔던 사회주의는 갔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들이 정의로운 마음을 갖고 하나의 힘과 권력이 되어서 삐뚤어진 사회를 바로잡는 정의로운 세력이 되기 바라는 꿈은 4~5년 전에 접었습니다.  사라진 현장이라는 것을 제 관점으로 얘기했습니다.  80년대부터 소위 혁명운동을 한다는 생각을 했고,  자본주의 세상을 꺾어 버리고 공산주의를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투쟁현장에서 힘들게 싸워왔고, 그거 하나 때문에 많은 것을 버리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만들었던 노동현장은 지금은 없습니다.  
  현대중공업은 지금은 제명되었죠.  현대중공업은 제가 그때 봤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비정규직은 다른 현장에서 일하는 줄 아는데 같은 현장에서 같은 라인에서 일을 합니다. 같이 앉아서 일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었습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왜 열사냐, 가정이 조금 어렵고 뭐 그렇게 해서 죽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보통은 반대잖아요. 그렇게 죽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남긴 유서와 내용을 안고 살아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논리를 적용한다면 전태일 열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도 죽더라도 그 전까지 몸달아 갈구했던 것의 몫을 하고 죽겠다는 것이 전태열 열사의 목소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수십 차례의 투쟁과 수백 명의 활동가들이 감옥을 가고 활동가들이나 대의원들이 현장에서 다 겪어왔던 단련된 노동자들입니다.  제가 10년 전에 갔을 때 현대중공업의 평균 나이가 36세라고 하던데 지금 평균 나이가 46세입니다.  그 사람 그대로라는 얘기입니다. 별로 뽑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그 사람들이 계속 바뀌었다고 한다면 역량이 감소되었고 노동조합에서 교육시스템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는데 그 동지 그대로 있는 사업장에서 가장 반동이 되었습니다.  한국 노동운동에서 어떤 식으로 분석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훈련을 많이 받고 노동운동에 전부를 걸고 싸워왔던 사업장이 가장 반동이 되었습니다.  박일수동지 건으로 금속노조연맹에서 제명되었습니다.  그 잣대로 민주노총 산하에 들이댄다면 별로 남는 연맹조합은 없을 것입니다.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등을 돌렸다.
왜 이렇게 되었나?
노동현장이라는 것이 치열하게 자본의 노동탄압과 자본의 욕심과 늘 대비되고 으르렁거리는 현장임에도 왜 이렇게 옆 사업장을 위해서 머리띠를 안 매느냐는 얘기입니다.  자기사업장의 임금이나 복지, 우리 사업장과 관계된 제도개선을 위해서 빨간 머리띠 두르고 큰 소리 지르며 투쟁가를 부르는 모습은 이제는 부끄럽습니다.  
비정규직은 임금이 반, 아니 반도 안 됩니다.  10년차 한국통신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 연봉 4,000만 원 됩니다.  그러나 비정규직 한국통신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한달에 90만 원밖에 안됩니다.  1/3도 안 됩니다.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본과 정치권력의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넘어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통신 노동자들이 계약직 노동자들에게 등을 돌린 이유는 어차피 국가와 자본에서 고용을 조정하려 하고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 질서를 다시 개편하는 과정에서 점점 인력이 감축될 것이 뻔한데 이들이 정규직화 되면 방패가 없어지고 결국 해고될 확률이 더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정규직은 정규직대로 남아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일종의 방패가 되어달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화를 제기하면 그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구로연투가 연대투쟁을 했기 때문에 노동운동사에 크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연대하지 않는 노동운동은 아무 의미가 없다.  힘의 단위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지금 이렇게 되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주장했던 것은 하나입니다.  임금은 작게 받아도 좋으니까 일은 열심히 할 테니까 해고 당하는 걱정은 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2003년도의 배달호(산별운동 탄압에 대해 분신) 동지를 시작해서 10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분신을 하고 죽었습니다.  2004년에도 현대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 박일수씨, 세원테크의 이현중씨 등이 죽었습니다.  
  
❐정의로운 노동운동,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노동조합
  노동자들이 장애인 복지, 노동자 복지 등을 스스로 기획하고 연구단체들과 합해서 결과를 내놓고 그것의 이익을 위해서 파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임금 협상으로 투쟁하는 것보다는 정의롭고 대의적인 일을 가지고 싸웠으면 좋겠습니다.  현장의 노동자들은 새로운 프레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노동운동에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간부들, 지도자들, 이론가들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노동운동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는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노동현장에 노동조합 간부들, 노동운동의 내용,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에서 가지고 있는 노동운동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10년, 20년 가봤자 조기축구회가 이런 저런 사안으로 연대해서 희망을 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잡아나갈 수 있는 그런 것마저도 보이지 않습니다.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서 벌어진 것만 봐도 연대를 하지 않고 자기 밥그릇만 챙기려 해서 맞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대병원에서 아주머니 한분이 해고당했을 때 병원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잘못된 것에 대해 투쟁하고 많은 협상을 했음에도 끝까지 사측에서 양보 안 할 때 전 병원에서 파업하고 해서야 바로 복직이 되었습니다.  노동조합원들이 받쳐주면 복직은 거의 99% 가능합니다.
  분명히 나쁜 일이고 정의롭지 못한 일이고, 사측이나 자본의 일방적이고 옳지 못한 논리라면 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탐구와 노력과 공부를 하고 맨 나중에 큰 힘으로 깨뜨려온 것이 그동안 노동운동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기축구회 예를 많이 드는데, 동네를 중심으로 모여 있습니다.  지역에 행사가 있거나 하면 같이 일도 해주고 새벽에 움직이니까 새벽이나 밤늦게 방범 역할도 좀 해주고 하는 식으로 지역사회에 스며들면서 일에서 자긍심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동운동이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울산 현대중공업 앞의 산업도로에 교통사고가 엄청나게 많이 납니다.  노동조합원들이 학교 가는 애들을 위해서 교통정리도 해주고 하면 지역에도 좋습니다.  33,000명이라는 인원이 하루에 100명씩 동원해서 막아줘도 1년에 한 번 꼴로 돌아옵니다.  1년에 한 번씩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교통정리를 해주면 지역 주민들에게 현대중공업 노조가 있어서 주민들에게도 좋다는 인식을 주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도 새롭게 포맷을 해야 할 때이다.
  진보적 노동운동의 집단으로 대변되고 있는 민주노총의 활동가들, 정책에 영향력을 미치는 노동운동가들이 일거에 물러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들 자신은 과거의 엄청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운동가들이 길을 못 찾고 있고 조직을 제대로 못 이끌었기 때문에 노동현장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기준과 선이 없다 보니까 방황하고 있습니다.

  일선의 노동운동가들은 이제 물러날 때입니다.  노동조합의 간부들, 노동조합 활동가, 이론가들이 이미 기득권화 되었고 파벌화 되어 있습니다.  노동조합을 장악하는 것이 정치적 기득권이 되었습니다.  노동운동을 자기가 올라가려고 하는 길의 계단으로 생각하는 간부들이 있습니다.  

  이수호 위원장님이 과거에 노동운동에 대해 좋은 일을 해오신 것은 인정하지만 이제 서로 예민한 사항은 대화로 풀어갈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아무것도 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여러 정책을 펼친 것으로 아는데, 희망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에게 이수호 위원장이 정치권의 실세를 만나서 욕이라도 한마디 하고 재떨이라도 집어던지는, 경호원에 의해 끌려 나가는  그런 모습이 신문에 실리는 분을 지도자로 모시고 싶습니다.
  
  지금의 더 이상 희망도 없고 밥그릇 싸움하는 상황이 어디까지 가겠습니까?
학생들이 조직활동가들을 보면서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인텔리 활동가들이 노동현장에서 활동을 하니까 노동자들을 업그레이드 시키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노동운동이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새로 포맷이 되어야 합니다.
노동현장을 자기가 올라가려고 하는 길의 계단으로 생각하는 활동가들이 기득권을 잊어버렸으면 좋겠는데, 그런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희망은 없습니다.

  현장에서도 파벌이 소멸되고 토론이 자유롭게 진행이 되고 정말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도부가 나타나도록 만들어 내는 것이 노동운동의 숙제입니다.  가장 대규모의, 또한 열심히 투쟁했던 현대중공업, 서울지하철노동조합, 한국통신(KT)이 가장 막걸리가 되었습니다. 대규모 사업장은 다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노동운동도 새로운 조직으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노동자들이 젊은 사고를 가지고 과거 노동운동의 좋은 데이터를 안고 새롭게 시작했으면 합니다.  
노동운동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단체에 맡겨두어야 합니다.  노동조합이 모든 것을 하려들지 말고 역할분담이 공론화 되어야 합니다.  조합원 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관성을 버려야 합니다.

❐초대회원 소개
김호철 : 노동의 소리 대표, 노동가요(꽃다지, 단결투쟁가 등) 작곡가,
        한국체육대학 태권도과, 총학생회장

  제 소개를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저는 한국체육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인데 1980년 5월에 많은 일이 있을 때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전국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 했었는데,  서울역 앞에서 데모를 하다가 계엄군에 잡혀서 감옥 갔다가 강제징집당해서 군대에 갔는데 거기 군악대에서 나팔을 배웠습니다. 전과가 있어서 살길은 나팔을 부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배웠습니다.  먹고 살려고 밤무대에서 2년간 일을 하다가 그만 두고 여동생의 권유로 현장으로 들어가서 위장취업을 했습니다.
  노동현장에서 문화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문화국에서 활동을 하다가 처음으로 만든 노래가 ‘파업가’입니다.
노동자들의 가장 큰 문제가 ‘내 주제에 뭘 ~’이러면서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인이라는 내용을 노래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8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는 노동자들의 일상을 파고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생활가요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포장마차’ 등을 만들었습니다.
9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노동운동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우리를 다지고 돌아보고 닦는 노래를 만들고 있습니다.

  99년에 노동의 소리를 만들어서 FM 노동방송을 준비하다가 지금은 노동의 소리만 남아 있습니다.
노동문제에 대한 사안에 대해 자기 의견도 얘기하고 소식도 전하고 가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는 사이트입니다.  
  노동가요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직업적 소명으로 그 시기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대안을 말하기는 역부족입니다.  
한 집단이 아니라 민족과 인류사회의 미래를 고뇌하는 KG에 기대가 큽니다.  저도 힘 닿는 대로 열심히 참여하겠습니다.


* 가을 깊은 밤에 김호철 선생님의 멋진 트럼펫연주를 들었습니다.
<한글 파일을 별로도 올립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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