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차 화요마당 자료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사회 이해와 노자의 정치 철학"

by KG posted Mar 02, 2005
<제51차 화요마당>-참고자료
일시 : 2005년 3월 8일  
초청 : 김광하 (작은손길 대표)

1) 사마천이 전하는 노자

사마천(B.C. 145-86 추정)은 󰡔사기열전󰡕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서 노자에 대한 여러 사실을 전하고 있다. 노자는 초나라 사람으로 성은 이(李)이며, 출신지는 고현 곡인리 사람이다. 이름은 이(耳)며, 자(字)는 백양이다. 직업은 주나라의 수장실(守藏室), 즉 왕실서고(王室書庫)의 기록관이었다. 주나라가 쇠약해지면서 노자는 주나라를 떠나게 된다. 노자가 변경 관문에 이르렀을 때, 관문의 관리인 윤희가 글을 청하자, 노자는 상하(上下) 두 편의 책을 써서 전하고는 떠났다. 이 책이 노자도덕경이다.
사마천은 다른 몇 사람도 노자로 알려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한 사람은 초나라 사람 노래자(老萊子)인데, 15편의 책을 남겼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으로 주나라 태사(太史) 담(儋)이 노자라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당시인 기원전 1세기 경에 이미 노자에 대해 사적이 분명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사마천은 노자를 숨은 군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마천은 이어서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만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禮)를 묻자,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말하는 옛 성현은 이미 형체가 썩어 사라진지 오래요, 오직 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훌륭한 장사꾼은 귀한 물건을 깊이 감추어 놓듯이, 군자는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바보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대는 교만과 여러 욕심을 버리고, 잘난 체하는 것과 어지러운 속뜻을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요. 이런 것은 모두 그대의 몸에 무익할 뿐입니다. 내가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오.”
공자는 노자를 만나고 나서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새는 잘 날고, 고기는 잘 헤엄치며, 짐승은 잘 달리는 것을 나는 안다. 달리는 놈은 그물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놈은 낚시 줄로 잡을 수 있고, 나는 놈은 화살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에 이르러서는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나니 알 수가 없다. 내가 오늘 만난 노자는 용과 같다고 할까.”

주나라 말기에 나라가 쇄약해지고 상하의 계급질서가 무너질 때, 공자는 과거 주나라가 지켰던 예와 그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세상을 혼란에서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공자에 대해 노자는 오히려 무익한 길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세상의 혼란에 대해 공자와 노자가 서로 의견이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 차이는 개인적인 차이가 아니라, 유가(儒家)와 도가(道家) 두 집단 간의 대립이었다. 사마천은 두 학파간의 대립을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하는 자는 유학을 배척하고, 유학자도 역시 노자를 배척한다.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논의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사마천의 기록을 보면, 도가의 인물인 노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춘추전국시대 속에서 살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 흔히 말하듯, 공자와 노자의 도(道)가 궁극적으로 다 같은 진리라는 생각은 적어도 그 당시 현실에서는 진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2) 노장학(老莊學)의 접근방법

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노자와 함께 신불해와 한비자를 한 항목에 넣어서 설명하고 있다. 신불해는 황제와 노자에 근본을 두고 형명(刑名)을 주로 써서 부국강병을 이루었고, 한비자는 형명법(刑名法)을 제안했으나, 그 근본은 황제와 노자의 도였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노자의 도는 사마천이 살던 한나라 당시까지 천하를 다스리는 정치도덕으로서 이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노자도덕경 내용 속에는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와 공자의 도덕에 대한 비판이 담겨져 있다. 이렇게 볼 때 노자의 철학은 정치철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정치는 지금 우리 현실의 정치보다 그 폭이 깊고 넓다.
공자는 일찍이 “정치[政]는 바르게 하는 것[正]이다”라고 했다. 논어 위정편에서 “오직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에게 우애하는 것이 정치에 있어서 베푸는 것이다. 이 역시 정치를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공자는 군자의 덕목으로서 시와 음악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렇게 볼 때, 춘추시대에서 의미하는 도덕은 신분질서와 가족, 나아가 시와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광범위하게 규정하는 총체적 규범인 것을 알 수 있다.
시중에서 출판된 노자도덕경 주석서 중에는 도덕경을 개인적인 처세술이나 신비적인 명상수도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 눈에 많이 띈다. 또는 우주에 대한 깨달음을 노자가 전했다거나, 혹은 유교나 불교의 진리와 상통한다는 입장에서 도덕경을 풀이한 책도 접할 수 있다. 대개 여러 학문에 해박한 사람이 이런 형식의 주석서를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노자도덕경이 처한 그 당시 중국의 혼란한 현실과 노자의 고유한 문제의식을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아 아쉬움을 준다.
노자도덕경을 춘추전국시대 속에서 이해하려는 필자의 태도는 회남자(淮南子) 등 한대(漢代) 도가파(道家派)의 입장과도 구분된다. 필자는 노자도덕경을 혼란과 모순이 극대화된 춘추전국시대에 그 당시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고, 인간과 자연의 실상을 규명하여 그 대안을 제시한 책으로 이해하고 있다.


3) 노자도덕경의 성립 시기

노자도덕경에 보면 여러 용어, 이를테면 상(象), 현빈(玄牝), 무물(無物), 황홀(恍惚), 현덕(玄德), 복명(復命) 등이 나온다. 그리고 그 뜻을 설명하면서 공자의 유학이나 법가를 비판하고 있다. 특히 무거운 형벌로 백성을 노예처럼 부리는 전제주의적 정치나 전쟁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러한 태도는 한 개인의 정서로 보기는 어렵다. 이것을 볼 때, 도덕경이 성립된 시기는 부국강병을 위해 중앙집권적 정치도덕의 모순이 심했던 전국시대(B.C. 480-B.C. 222,)의 초기 혹은 중기로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도덕경은 전국시대 제(齊)나라 임치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직하학자(稷下學者)들이 그 당시 전해오던 노자의 말을 황노학(黃老學)으로 확립했다는 설이 있다.
고(故) 구본명 교수는 도덕경의 성립 시기를 한나라 초기(B.C. 200-140년 경)로 추정했다. 현대 중국의 유소감(劉笑敢) 교수는 도덕경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내용의 반 정도가 고시형식(古詩形式)의 4자시(四字詩)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도덕경의 최초 성립 시기를 시경(詩經)과 같은 시대로 보고 있다.(󰡔노자철학 -노자의 연대고증과 텍스트분석󰡕, 유소감, 김용섭 역, 청계, 2000)  
한편 도덕경에 나오는 상장군(上將軍), 편장군(偏將軍)의 관직명이 전국시대의 고유한 관직 이름인 점을 들어 전국시대 말로 보는 관점도 있다. 노자도덕경에는 세역(稅役)의 과다함, 무거운 형벌, 전쟁에 의한 참상 등 백성의 피폐한 삶이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도덕경은 전체적으로 볼 때, 전국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도덕경에는 ‘까닭 고(故)’가 흔히 나온다. 이것은 도덕경이 예부터 내려오는 말을 가지고 주장을 펴는 듯한 인상을 준다. 특히 57장과 78장에서는 노자가 예부터 전해오던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주나라 말기 춘추시대에서 전해오던 노자의 말을 전국시대 초기 혹은 중기에 도가의 한 현인이 현재와 같은 도덕경 형태로 편집 재구성한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겠다.
1993년 발굴된 곽점(郭店) 죽간본(竹簡本)은 가장 최근에 발굴된 고본 도덕경이다. 마왕퇴에서 발굴된 백서(帛書)본보다 앞서 있지만, 내용은 백서본과 유사하다. 죽간본의 발견에 의해 노자도덕경의 성립시기를 전국시대 중기(中期 -약 기원전 300년 전후)까지 소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죽간본은 아직 완정본(完整本)이 아니다. 도덕경 성립 시기의 문제는 향후 새로운 사료의 발굴에 의하여 더 명확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4) 노자도덕경 읽기

1973년 12월 호남 장사에 있는 마왕퇴(馬王堆) 3호 고분에서 백서(帛書)로 된 고본 노자도덕경이 발견되었다. 현대 대만의 학자 진고응(陳鼓應)은 이 중 갑본(甲本)의 성립연대는 B.C 205년에서 195년으로, 을본(乙本)의 성립은 B.C 194년에서 18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백서의 갑본에는 장의 구분을 뜻하는 방점이 찍혀 있지만 지금의 형식과는 다르다. 그리고 을본에는 지금과 같은 장의 구분이 없다. 그리고 갑을본 모두 덕경이 먼저 나오고, 도경은 뒤에 놓여 있다. 도덕경이 지금처럼 81장으로 나뉘어서 읽히게 된 것은 후한시대 하상공에서 비롯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필자는 노자도덕경을 81장으로 나누지 않고 두 편의 글로 읽을 때, 전체의 흐름을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으로 나누어 해석하다 보면 도덕경의 저자가 다양한 인격으로 나타나기 쉽다. 어떤 장에서는 노자가 명상가가 되기도 하고, 다른 장에서는 성리학자가 되어 사물의 본성을 밝히는가 하면, 또 다른 장에서는 갑자기 물리학자가 되어 원자구조를 밝히는 듯하고, 때로는 병법을 가르치는 노회한 처세술가가 되기도 한다. 한편 신선도 계열에서는 노자를 단(丹)을 수련한 신선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도덕경을 81장으로 따로 나누어 해석하다 보면 도덕경 전체에 대한 조망이 어렵다. 책을 쓴 사람이 여러 사람이라면 몰라도 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쓸 수가 없을 것이다.
도덕경은 장자와 열자 등 도가서의 사상과 같은 흐름 속에 있다. 따라서 도덕경은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도가의 사상 속에서 이해하되, 읽을 때는 상편과 하편 두 개의 논문으로 읽으면서 전체적으로 글의 흐름을 추적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노자의 도경(道經)을 읽기 전에,

중국 춘추전국시대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여러 사상들이 나타났다. 유가(儒家) 묵가(墨家) 도가(道家) 등 제자백가의 여러 사상이 그것이다. 그 중 유가와 법가가 그 당시 현실 정치의 도(道)로서 널리 채택되었다.
춘추시대의 공자(B.C. 552-479)는 주나라에서 내려오는 전통적인 예(禮)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주장했다.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덕치(德治)는 왕, 귀족, 평민 등 상하(上下)가 계급 간 불평등을 인정하면서, 그 관계를 상호 겸양의 예로써 질서를 지켜가는 제도이다. 계급에 따른 행동규범과 물질적 소유의 한계를 규정한 주나라의 예는 봉건사회의 질서를 안정적으로 지켜 가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공자는 예로 나라를 다스릴 때, 백성은 염치를 알게 되어 손바닥을 뒤집듯 쉽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말했다. 공자의 도는 인의(仁義)를 실천하기 위해 충(忠) 효(孝) 공손함(恭) 사양(讓) 극기(克己) 등을 배우고 익혀야 할 덕목으로 내세우고 있다. 공자는 군신상하(君臣上下)의 질서가 무너지는 현실 속에서 타락해가는 예의 정신을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법가(法家)는 이러한 유가의 주장은 관념이며 현실에서 실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법과 형벌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주장했다. 부모 말을 듣지 않는 불효자도 관청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그 형벌이 무섭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유가의 주장을 반박했다.
공자보다 30여년 앞선 정나라 자산(子産 ?- B.C. 522)은 춘추시대 법가의 사상을 편 사람이었다. 그는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아울러 귀족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상하귀천의 질서를 법으로서 확립했다. 자산의 이와 같은 정책은 전통적인 예치(禮治)에 의해서는 실현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산은 공자나 숙향(叔向) 등 당시 지식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제적 구속력과 집행력을 가진 법률을 제정하여 공표했다. 자산은 이것을 청동으로 만든 솥(刑鼎)에다 새겨서 공포했는데, 중국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알려져 있다. 자산이 법을 성문화한 것은 실상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현실적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에 맞서 백성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정한 역할을 하였으나, 그 목적은 국가의 세금과 부역을 늘이는 데 있었다.(이춘식: 중국고대사의 전개, 신서원, 1997)
당시 진(晉)의 대부 숙향은 자산(子産)이 실시하는 성문법으로서의 법치(法治)를 비판했다. 자산은 법을 세워 귀족의 세력을 누르는 것이 기존의 질서를 회복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주장했으나, 숙향은 이 경우 백성이 법의 준수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존비귀천(尊卑貴賤) 등 기존의 예법에는 등한히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숙향은 자산에게 장차 도덕과 예법에 의한 전통적인 정치질서가 사라질 위험을 경고하였다.(박건주: 중국고대의 법률과 판례문, 백산자료원, 1999)
B.C 536년 정나라 자산이 형법을 청동 솥에 새긴 이후, 진(晋)나라에서도 형정을 주조하였다. 그러자 공자 또한 진나라 대부 숙향과 같이, “백성들이 솥 위에 새겨진 법률 조문을 살펴보고 형벌의 경중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어찌 귀족을 존중하겠으며, 귀천의 구별과 서열이 없어졌으니 나라는 또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하며 탄식했다. 전통적인 예를 다시 확립하여 혼란한 춘추시대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생각은 공자가 처음은 아니었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제후 간의 질서가 무너지고 나라마다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시점에서 나온 새로운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춘추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법가 인물로 자산, 관중, 이극, 오기, 상앙 등이 있다. 이극(李克 B.C 403-377 ?)은 위(魏)나라 사람으로 문후(文候) 때 재상을 지냈는데, 공자의 제자 증자와 자하(子夏)에게서 배웠다. 오기(吳起)는 초나라에서 출세하였는데 초기에는 증자(曾子)와 자하에게서 유학을, 후에는 이극에게서 법가의 도를 배웠다. 법가의 여러 인물들이 모두 처음에는 공자의 학문을 배웠음을 알 수 있다. 진(秦)나라에서 출세한 상앙(商央 B.C 390?-338?)도 이극의 학문을 배웠다.
한편, 전국시대 후기에 활동한 순자(荀子)는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타고난 상태는 무질서하다고 했다. 그래서 예법을 익히지 않으면 백성이 신분질서를 지키지 않고 누구나 왕이 되고자 하거나, 물건을 약탈하는 등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춘추시대(B.C 770-453, 혹은 722-481)를 지나는 동안 170여개에 달한 나라는 서로 병합하는 시기를 거치게 되었고, 작은 나라는 거의 멸망하였다. 그 결과 전국시대(B.C 453-221, 혹은 480-222) 초기에는 단지 20여 나라만 남게 되었다. 이들 나라들은 정벌과 병탄을 거쳐 전국시대 중기에는 제(齊) 초(楚) 진(秦) 연(燕) 조(趙) 위(魏) 한(韓) 등 7국이 남아 서로 다투었다. 이들 전국 7웅(戰國七雄)은 결국 진(秦)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나라가 망하는 사이에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전국시대 200여년 사이에 일어난 크고 작은 전투는 거의 500여회에 달했다고 한다. 춘추시대에 강국이었던 진(晉)·초(楚) 사이의 전쟁은 규모가 크기로 유명했다. 그 당시 진(晉) 나라가 보낸 병력은 5만여 명이었다. 그러나 전국시대 말기의 진(秦)·조(趙)사이의 장평전(長平戰)은 조(趙)나라의 병졸 사상자 수만 45만 명이었다고 한다. 전국시대에는 농사를 짓던 백성이 전쟁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사마천 『사기열전』 백기(白起)·왕전(王翦)열전에 이 당시 장평전(長平戰)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진(秦)나라 왕은 조(趙)나라 군대의 보급로가 끊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직접 황하 이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각각 작위 한 계급씩을 내리고, 15세 이상인 사람을 뽑아서 모두 장평으로 보내 길을 끊었다. 조나라 군대가 46일 동안이나 식량을 보급 받지 못하자, 내부에서는 서로 죽여 사람의 살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조나라 장군 조괄의 군사가 패배하니 병졸 40만 명이 항복하였다. 그러나 진(秦)나라 백기(白起)는 조나라 군사를 살려 보내면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고 하여 어린아이 240명만을 조나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는 속임수를 써서 산채로 땅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이 때를 전후로 하여 머리를 벤 자와 포로가 된 자는 45만 명이나 되었다. 조나라 사람들은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고 사마천은 전하고 있다.
전쟁에는 언제나 살상과 죽음의 위험이 따른다. 그러나 진나라 왕은 백성들이 전쟁에 앞장서 싸우도록 백성들에게 한 계급씩 작위를 내렸다. 전쟁을 싫어하는 사람의 자연적 본성을 마비시키기 위해 이익으로 백성을 유인했던 것이다. 15세 이상을 모두 징발하였고 전쟁이 46일이상이 걸렸으니, 백성의 생업인 농사일은 거의 전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쟁에 나가는 군졸을 어떻게 양성했는지 그 선발과정과 정치적 폐해를 순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위나라에서는 무졸(武卒)이라고 하여 일정한 시험에 의하여 무용(武勇)이 있는 병졸을 뽑습니다. 그 시험을 보면, 몸의 윗부분에 한 장, 허리 부분에 한 장, 정강이에 한 장, 이렇게 세 가지 갑옷을 입고 12석 짜리 무겁고 강한 쇠뇌를 잡은 위에, 화살 쉰 자루가 든 살통을 등에 지고, 그 위에다 창을 꽂고 여기에 또 투구를 쓰고, 긴 칼을 옆에 차고, 그리고 사흘 먹을 양식을 꾸려 짊어지고는, 한 낮까지 백리 길을 냅다 달리게 합니다. 이리하여 시험에 합격하여 무졸이 되면 그 집은 나라에서 책임지우는 노역이 면제될 뿐만 아니라, 토지 가옥에 대한 세금도 많이 감면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구한 방법은 못됩니다. (중략)
또 진(秦)나라에서는,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아주 곤궁하게 하고 백성을 부리는 데는 더없이 가혹하게 합니다. 그리고 권세를 가지고 그들을 협박하고, 아주 가혹한 법으로 그들을 얽어두며, 또 그들을 벼슬과 상으로 길들이고, 무서운 형벌로 박해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위로부터 이익을 얻으려면 오직 싸움에 나아가 전공을 세우는 길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을 알게 합니다. 이리하여 그토록 절박한 환경 속에서 그들을 싸우게 하고서 승리를 거둔 뒤에야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해줍니다. 이에 공적에 따라 상을 주고 장(長)의 자리를 주는데, 그것은 곧 적군의 목 다섯을 베어오는 사람에게는 그 동네 다섯 가호의 장으로 시켜주고 그들을 지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순자』 의병(義兵)편, 송정희 역, 명지대출판사, 1973)  

순자의 글을 보면 그 당시 정치의 현실을 짐작할 수 있다. 백성은 전쟁에 나가 적군을 죽여야, 그나마 열악한 형편이 펴지게 되었다. 충성을 하는 것은 나라의 신민(臣民)으로서 선(善)이지만 죽음의 위협이 항상 따랐다. 전국시대 중기와 말기에 이를수록 전쟁의 목적은 상대방을 멸망시키는데 있었다. 전쟁이 심할수록 국가는 백성의 희생을 요구하였다. 법과 예는 겉으로는 백성을 다스리는 도덕적 규범이었지만, 그 수단은 가혹한 형벌이었다. 『한비자』 난이(難二) 편을 보면, 전국시대 형벌의 정도를 엿볼 수 있다.

제(齊)나라 경공은 형벌을 몹시 심하게 하였다. 경공이 시장 물가를 묻자, 안영은 대답했다.
“뒤축없는 신은 비싸고, 보통 신은 쌉니다.”
“왜 그런가?
“형벌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발을 베는 형벌을 남발하여, 보통사람이 신는 신발보다 발이 잘린 사람이 신는 뒤축없는 신발값이 더 비쌌다고 한다. 형벌이 많은 것은 법을 지키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도덕경의 저자가 진(秦)나라에서 변법(變法)을 편 상앙(商鞅 B.C 390-338 추정)의 정치를 보았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진나라의 정치를 보면 전국시대 당시 정치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상앙이 만든 법은 전쟁에 나가 적의 머리를 베는 숫자를 가지고 전공을 삼았다. 적의 목을 따온 수에 따라 벼슬이 올라가는 제도이다. 당연히 벼슬이 올라갈수록 물질적 신분적 혜택이 주어졌다. 그리고 부역이 면제되는 나이를 내려주었다. 젊었을 때 사람을 많이 죽여야, 늙어서 일찍 편안할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아비가 전쟁에 나가면 부녀자들은 길에 따라 나오면서 적의 머리를 많이 베어 오라고 부탁했다고 순자는 전하고 있다. 진나라는 목을 따서 공을 세운다고 ‘수공지국(首功之國)’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러나 실제는 여자와 아이의 머리를 가지고 전공을 위장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다 큰 성인의 목은 베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특히 다양한 학문이 발달했다. 군주는 백성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법이나 정교한 상벌체계에 대한 지식, 또 곡물을 증산하는 농업기술, 전쟁에 이기는 병법이나 축성술, 물자수급의 원활한 관리를 위해 수학(數學) 등의 지식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학문을 배우는 계급이 귀족에서 평민으로 확대되었다. 제자백가의 다양한 학문은 그 당시 춘추전국시대가 요구한 산물로 볼 수 있다. 평민의 입장에서 보면, 법과 예, 병법, 수학 등 정치와 전쟁에 대한 지식은 출세의 수단이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병법에 대한 책을 저술한 사람이 18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노자는 출세를 위해 지식을 추구하는 그 당시 지식인의 태도와 당대 학문의 성격을 비판하고 있다. 장자(莊子)는 진정한 지식(眞知)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도덕경에서 도경(道經)은 1장에서 37장까지이다. 도경을 통하여 노자는 인간과 만물의 실상을 해명하며 아울러 유가와 법가의 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도(道)는 문자 그대로 길을 의미한다. 노자의 도는 인간과 사물이 걷는 길이다. 백성이 따라야하는 규범으로서의 길이 아닌, 규범 이전에 타고난 대로 걷는 자연의 길이다. 국가는 옛 성인이 만들었다는 예와 법을 따르도록 백성에게 요구하지만, 인간은 그 길을 걷지 못하고 있다. 예법을 기준으로 평가할 때, 규범을 모르거나 법을 어기는 것은 불선(不善)과 불의(不義) 또는 불인(不仁)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예법이 없는 현실은 미성숙과 무질서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 상태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자연적 조건이기도 하다. 노자는 불선(不善)과 불의(不義)가 나타나는 당대 현실과 정치를 문제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과연 인간의 자연적 조건은 미성숙하고 무질서한가?  
노자는 인간과 만물의 실상을 성찰 경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울러 인간과 자연의 현실을 규명해가는 인식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해제에서 이미 설명하였듯이 춘추전국시대에서 말하는 정치(政治)는 오늘 날의 정치보다 그 뜻이 넓고 깊다. 따라서 독자는 이 책에서 말하는 정치의 의미를 선과 악, 옳고 그름, 이익과 손해, 신분의 귀천 등을 규정하는 윤리적 규범이자, 백성을 다스리는 국가의 통치행위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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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68차 화요대화마당 "대학주도의 교육혁신 방향" KG 2005.07.18 1632
291 67차 화요대화마당 "한국영화산업은 위기인가?" KG 2005.07.10 1267
290 66차 화요대화마당 "재난관리와 국제협력" KG 2005.07.10 1342
289 65차 화요대화마당-사법제도 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KG 2005.06.30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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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43차 화요대화마당 : 2005년 한반도문제 전망- 북한인권문제 연관하여 KG 2004.12.07 1403
285 39차 화요대화마당-‘신행정수도이전특별법’ 위헌 심판 어떻게 볼 것인가? 希言 2004.10.29 1331
284 36차 화요마당- 사라진 현장과 여전한 현장 KG 2004.10.25 1374
283 35차 화요대화마당-고구려의 교훈에서 배우는 동아시아와 한국의 미래 希言 2004.09.1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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