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지난 2006년 가을 인문학의 위기를 둘러싼 논란 이후, 무차별적인 시장논리에 의한 구조조정의 칼바람으로부터 인문학을 살려내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인문학은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에 대한 본질적 설득의 과정은 생략된 채 국고지원과 대형프로젝트 양산으로 흐른 것은 아닌지 되새겨 보게 된다.
151차 화요대화마당은 김형찬 고려대 철학과 교수와 함께 “지식정보화시대에 다시 보는 조선”을 주제로 유학으로 상징되는 조선과 조선의 지식인을 재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칼(武)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에 지식(文)으로 500년을 이끌었던 조선의 원동력을 기록문화와 성리학 이론의 발달에서 찾은 김교수는, 조선의 유학과 유학자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공리공론과 형이상학자로만 보지 말고 그 경험과 노하우를 되살리는 방안을 찾자고 제안했다. 현실의 생활과 지식, 학술적 논쟁과 후학양성이 결코 분리되지 않았던 조선의 경험이야말로 21세기 지식정보화시대를 여는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사전발표 요약]
조선시대 유학이나 유학자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입니다. 식민사관에서 보면 나라를 말아먹은 집단이었고 다르게 보면, 선비들의 절개가 찬란한 문화를 꽃 핀 시대였죠. 특히 조선 유학에 대해서는 공리공론, 형이상학적 논의에 빠져서 현실에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하지만 500년 동안 나라가 지탱되었다면 아무리 비현실적이라도 존재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철학적 관점에서 유학, 성리학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경북 안동 국학진흥원에서 목판 10만장 수집운동을 하고 있는데 2001년 10월부터 지금까지 약 5만2천여 장을 모았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만 문집 목판이 약 100만장 쯤 찍혔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많이 소실되고 지금은 약 20만장 정도 남아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중 약 60% 정도가 영남 쪽에 남아있다고 하는데, 국학진흥원의 목표는 불교의 8만대장경을 염두에 두고 2010년까지 10만장을 모아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겠다고 합니다.
문집이라는 것은 조선왕조실록 같이 국가에서 만든 것을 빼고 완전히 각 집안에서 사설로 만든 것인데, 인류 역사에 유래가 없는 많은 양이죠. 문집 하나를 만들려면 집안에서 돈을 모아서 만들어 찍고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장판각을 지어 보관하는데, 보통 3~4대 정도가 준비를 해야 문집 하나를 만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기둥뿌리가 뽑히는 일인데, 그것이 약 100만장이라면 엄청난 것입니다.
그 동안은 각 문중에서 보관하고 내놓지 않았는데, 최근에 젊은 후손들이 외지에 살고 관리가 어려우니까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진흥원에 장기 보관을 수탁하고 그런 기관에서 디지털 작업화해서 연구 목적으로 활용합니다. 사실, 한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기록유산들이 남아있는 곳은 없죠. 중국도 유교가 번성했던 작은 지방 정도이고 조선처럼 국가 단위로 번성한 곳은 세계에서 유일합니다.
문집 목판 100만장의 의미는?
저는 바로 이 기록문화가 조선시대를 특징짓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왜 기둥뿌리가 뽑히면서까지 기록을 남기려고 했을까? 나름으로 조선 유학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 공자, 맹자의 가르침에다가 불교와 싸우기 위해서 형이상학적 면들을 보완해서 이론적으로 체계화 한 것이 주자학이죠. 조선의 성리학은 이 주자학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상당히 특이한 형식으로 발달하는데 보통 두 가지로 이유를 찾습니다. 한국인들의 사고방식 즉 신화에 나타난 현세주의가 첫 번째 이유라면 도덕지상주의가 두 번째 이유입니다.
먼저 한국 신화의 현세주의를 살펴보죠. 우리의 신화라고 하면 단군신화, 주몽신화, 박혁거세신화, 김수로신화, 석탈해신화, 김알지신화, 삼성(三姓=良, 高, 夫)신화 등 7개를 말합니다. 우리 신화의 특징은 창조신화가 없다는 것인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으로 천하, 인간이 만들어지는 얘기가 없습니다. 즉 이미 산천초목과 땅이 존재하고 여기에 사람이 나오는 것(삼성신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큰 알이 떨어지고 거기서 대단한 인물이 나타나는 것 등 서양의 영웅신화처럼 이미 사람들이 잘 살고 있는 상태에서 탁월한 인간이 나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단군신화인데, 환인이 보니까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할 만한 지상이 존재하는데 거기에 아들 환웅을 내려 보내고, 이 환웅이 자식을 나서 단군이 되어서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면서 살아갑니다.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사고방식입니다. 애초부터 지상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고 여기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표인 세계관, 즉 현세주의적 세계관을 잘 보여줍니다.
조선 유학의 특징; 현세주의적 세계관
조선 성리학의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태극도(太極圖)는 주자가 성리학을 집대성하면서 태초부터 만물이 생성하는 과정을 정식화한 것입니다. 주렴계의 태극도를 보면, 제일 위에 태극부터 음양-오행-건도성남ㆍ곤도성여-만물화생으로 이어지면서 만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우주 전체의 틀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위치를 찾고 도덕적인 삶의 길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죠.
그런데 조선에 들어오면서 태극도에 대한 관심이 적어집니다. 조선의 이데올로기적 기틀을 만든 권근의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는 하늘에서 인간, 금수까지 어떻게 만들어지고 관계가 맺어지는지 설명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그림이 사람의 형상입니다. 인간 흉부 부분에 인의예지, 희노애구애오욕의 사단칠정이 있고 아랫부분에 금수가 나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형상으로 그림이 바뀌면서 핵심에 인간의 심성이 나오는 것으로 태극도설에 기초하되 인간중심, 심성 중심으로 바꾼 것입니다.

다음으로 정지운이 그린 천명도(天命圖)를 보면, 권근의 그림 바깥에 원을 하나 그린 것과 비슷한데 테두리는 음양으로 된 우주를 가리키고 그 안은 역시 심성입니다. 심성이 바르게 발현이 되면 인간이고 그렇지 않으면 금수ㆍ초목이 되는데, 이 그림을 보고 퇴계와 기대승이 논쟁을 벌이는 것이 그 유명한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이죠.
이 그림들을 왜 봤는가 하면 조선의 유학자들이 공리공론만 따지다가 나라가 망했다고 하는데, 그 논쟁이 무엇이었나를 보기 위한 것입니다. 대부분 인간의 심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16세기 중반의 사단칠정논쟁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으로부터 감정으로 발현되는 과정, 도덕적 본성과 감성의 구조와 작용 및 행위의 실천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18세기 인성물성(人性物性)논쟁은 인간의 본성과 사물ㆍ금수의 본성이 같으냐 다르냐(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에 대한 논쟁이었고, 19세기 심설(心說)논쟁은 성리학자들이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서 내적인 반성이 필요한데, 그 판단의 기준으로서 심성에 대한 논쟁들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심성이 도덕적으로 바른 판단, 선한 생각을 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 도덕적 본성을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16세기 퇴계 이후로만 따져도 3~400년을 이런 주제로 논쟁을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글들이 쓰여지고 그 글들이 문집으로 만들어진 것이죠.
인간 심성을 중심으로; 도덕지상주의
조선 유학의 논쟁은 ‘A’가 맞으면 ‘NOT A’는 틀린 것이 아닙니다. 퇴계가 기대승과 논쟁하면서 당신처럼 설명할 수도 있고 나처럼 설명할 수도 있는데 나처럼 해야지 후학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어느 쪽이 교육적 효과가 더 큰가를 두고 논쟁을 하는 것이죠.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한가한 얘기라고 하겠지만, 이런 논쟁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도덕을 실천하기 때문이고 만약 도덕적으로 살지 못한다면 금수와 다르지 않고, 금수와 가깝다면 오랑캐와 같고 벌을 주고 경계하고 내쫒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꿈꿨던 세상은 도덕적 본성을 구현하면서 사는 세상입니다. 그런 판단 기준은 현실에서도 적용이 되고 과거의 역사에도 미래에도 적용됩니다. 그래서 유학은 내세를 인정하지 않고 지상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하는 것이고 유교는 다른 종교처럼 사후심판이나 윤회를 인정하지 않고 현세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럼 현실에서 비리를 저지르면서도 벌은커녕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유학에서는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깁니다. 공자가 말하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이 바로 그것인데, 실증적인 역사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단해주는 역사관입니다. 바르게 살면 현재는 어려워도 후손은 덕을 입고 반대의 경우는 벌을 받게 되는 것인데, 연좌제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역사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니까 내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죽으면 나의 정신은 혈통을 통해서 후손에 이어진다는 애착, 집안에 대한 책임의식, 왕 앞에서도 목숨을 내놓고 바른 소리를 하는 것도 이런 인식 때문입니다. 당연히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는가를 두려워하게 되죠.
그런 역사 안에서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 것인가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게 성리학의 이론들이었습니다. 신, 우주의 구조, 자연의 이치, 인간의 본성, 사회의 구성원리 등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해서 인간의 본성에 맞게 살기를 교육하는 것입니다. 유가에서 불교나 천주교를 비판할 때 쓰는 주요한 논점 중 하나가 윤회나 사후심판으로 협박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실천하도록 설명, 설득하라는 것이죠.
춘추필법의 역사관; 유교적 이상사회 건설
다시 조선 유학의 논쟁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선시대가 5백년인데, 각각 당시의 역할에 맞는 다른 논쟁이 있었습니다. 먼저 사단칠정논쟁은 16세기 중반 건국세력이 공신이자 기득권자가 되고, 젊은 세력들이 사림파를 이뤄서 훈구와 사림이 성리학의 이상을 향해서 경쟁하던 시절, 명종임금 시기 갑자기 외척이 득세를 하면서 사림과 훈구 모두가 퇴락하는 시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퇴계가 현실에서는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 현직을 버리고 안동으로 내려가 공맹처럼 책을 쓰고 후학을 기르는데 매진하는 계기가 된 것이죠.
인성물성논쟁은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 근원은 같지만 개체 안에 들어와 있는 도덕적 본성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데, 이는 임진ㆍ병자 양란 이후 청나라 건국 시절에 금수로 여겼던 오랑캐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를 두고 시작된 논쟁입니다. 그리고 심설논쟁은 외세가 들어오는데 성리학자들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반성하면서 시작된 논쟁으로 모두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17세기 예송(禮訟)논쟁은 식민사관에서 볼 때 형이상학 공리공론의 대표적 논쟁으로, 얼핏 보면 그런 면이 있습니다. 효종 사후에 계모였던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 또 며느리상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지고 논쟁을 해서 서인이 이겼다가 15년 후에는 남인이 득세하는 과정으로 유명하죠.
그런데 내용을 살펴보면, 유교에서 ‘예(禮)’라는 것은 하늘의 이치가 조목조목 드러난 것(天理之節文)으로 예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우주자연의 이치를 통찰하는 학덕(學德)을 가졌다는 것이고, 이런 능력을 가진 자는 군자로서 소인들을 교화하고, 통치할 자격을 갖춘 것입니다.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추구했던 조선에서 ‘예’를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정치 현실에서 정권을 획득할 조건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송논쟁은 공리공론이 아니라 누가 국정을 담당할만한 자격을 갖추었는가를 가르는 상징적인 논쟁입니다.
이런 논쟁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살게 하는 것이 조선 유학의 목표였고 그게 모두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조선 후대로 갈수록 기록의 양이 늘어나는데, 퇴계집이 영인본으로 단행본 2권 정도 분량인데 후기에는 다산을 제외하고라도 이진상과 전우만 하더라도 편지, 비문, 예서 정리, 경전 주석 등 문서의 양이 늘어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또 논쟁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공부만 했던 것이 아니라 현장으로 들어가 정치를 담당하고 다시 학문으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고 논쟁을 되풀이 하는 과정이 계속되었죠. 저는 그것이 바로 500년 동안 조선을 이끌었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500년의 원동력; 기록문화와 성리학 이론의 발달
돌이켜보면 16세기부터 19세기 사이 세계 역사는 칼(武)의 시대였습니다. 그 가운데 문(文)이 권력에서 관혼상제, 교육, 군권까지 장악해서 생활 속 사고방식까지 지배한 나라는 조선이 유일합니다.
물론 19세기에 들어와서 선비들이 타락하고 유학이 경직 되면서 조선이 망했다는 사실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전까지 타락을 막았던 것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역사의 모든 것은 기록된다는 역사관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도덕적 삶이 필요하다는 신념이었죠. 즉 인간이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설득하도록 유학의 이론체계를 계속 바꿔가는 것이었습니다. 기록문화와 성리학 이론의 발달이라는 두 가지가 버티고 있어서 조선이 유지되었다고 봅니다.

오늘 주제로 잡은 것인 “지식정보사회에 다시 보는 조선”입니다. 칼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지식인들이 지식을 가지고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가 500년을 지탱한 것은 인류역사상 조선이 유일했고 이제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세계적으로 지식이 지배하는 사회가 만들어지는데 우리는 조선의 경험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리학이라는 이론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지식이 사회를 움직일 수 있었을까? 정치에서 생활 일반까지 지식이 끊임없이 검증되면서 다시 피드백 되는 시스템은 오늘날 어떻게 가능할지. 그 경험의 노하우를 살릴 수는 없는 것인지. 물론 지금과 시대가 다르겠지만 그 가능성에 대해서 같이 토론해 보고 싶었습니다.
[간담회 요약]
[KG]
조선 말기 유학의 타락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대표적으로 삼정의 문란을 드는데, 그 주역들 역시 지식인으로 유학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유학이나 성리학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김형찬]
어느 시대나 사고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많이 나타난 것은 사실이죠. 철학적으로 보면 다산 정약용의 이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유학의 정점이 ‘리(理)’인데, 다산은 ‘리’가 고귀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대신 ‘상제(上帝)’를 올려놓죠. 이것을 두고 천주교의 영향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다산은 인간에게 도덕적 본성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제가 인간에게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경향성을 부여하는데, 인간이 노력해서 그 경향성을 살리면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다산이 왜 ‘리’을 빼고 ‘상제’를 올려놓는가 하면 모두 ‘리’만 말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누가 따르겠느냐는 문제제기입니다. 이미 자발적 도덕적 통제는 어렵기 때문에 상제가 지켜보고 있다고 하면 늘 두려워하고 경계하면서 조심스럽게 살 것이라는 다산의 판단을 보면 이미 시대가 변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죠.
[KG]
유학에서 심성론을 강조하셨는데 결국 서구문물에 대한 개방성 등 현실세계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고 스스로 경직된 것이 가장 큰 폐단이었는데?
[김형찬]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다산의 예처럼 현실이 문란해지는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반대로 과연 조선의 선비들이 청렴했다면 조선이 유지될 수 있었을까도 쉽지 않습니다. 외세 때문이겠죠.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 선조들은 중국의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고려 때도 그렇고 조선에서도 병자호란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북학파가 나오면서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데, 이미 시대는 대륙이 아니라 해양 쪽에서 더 발달된 문물이 들어오면서 결국은 내부적 상황과 맞물려 나라를 잃고 말았죠.
[KG]
정치적으로 조선은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였고 유학은 양반이나 선비들만의 학문이었습니다. 지식도 통제되었죠. 그러다가 조선 중기를 넘기면서 상업이 늘고 물자가 풍부해지고 중인신분이 증가하면서 지식인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이 무너지고 말았는데.
[김형찬]
신분제에서 격차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백성을 다스리는데 편하기 위해서 지식을 통제했다는 부분은 오해가 있습니다. 조선 왕조 초기부터 시작한 작업이 책을 반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에 관한 그림책을 많이 만들었는데, 한문이 어렵고 체계적으로 이론을 이해하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니까 먼저 예의범절을 가르치면서 점차 이해를 시키는 노력을 했습니다. 후에 퇴계, 율곡의 향악운동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KG]
기록문화와 성리학 이론의 발달이 조선 500년을 지탱했던 두 가지 요소라고 말씀하셨는데,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는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고 다른 한편 이념보다 실용을 추구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김형찬]
이념이 팽창했던 시대를 겪고 나면 반작용이 나타나게 마련이죠. 마치 80년대 이념의 과잉을 겪고 난 이후와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문제는 이념 자체보다는 어떤 이념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있다고 보는데, 이념이 부재한 시대도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꼭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기 보다는 보통 문사철이라고 부르는 인문의 위기와도 연관지어서 생각할 수 있겠죠. 최근 서구에서 다시 부는 인문의 부흥을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지식정보화시대에 조선의 경험이 어떻게 의미있게 받아들여질지는 사실 저도 고민 중에 있습니다. 다만 지식인이 학습이나 후학 양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고 그 경험과 노하우가 검증을 거쳐 학문화되는 과정의 시스템과 노하우를 오늘날 지식정보사회에서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을지 함께 고민을 더 하자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참석회원 : 강성룡, 김광하, 김석규, 김현인, 배수진, 이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