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편 連載> MBC [기황후], 무지의 그늘에 숨어든 小中華

by KG posted Dec 27, 2013
MBC가 드라마 왕국이라는
옛 이름을 되찾으려다 보니 그런가,
또 사고를 쳤습니다. [기황후]

모두가 부러워하는 한미동맹은
명함조차 못 내밀 여몽동맹,
인류사에서 그 비슷한 예조차 찾기 어려운
황금의 시대를 굴욕의 시대로 그려놨습니다.

작가들과 PD들의 무지를 넘어서서
어찌 그리 조선을 세운 주자의 제자들과
역사왜곡의 틀이나 이야기가 같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다 못한 김운회 동양대 교수께서
(코리아글로브 연구위원) 붓을 들었습니다.
허락을 얻어 그 연재를 이리 옮깁니다.

코리아글로브의 몽골 단골들이여.
속 끓이지 마시고 코리안들의 5백여 년 묵은
소중화의 독이 빠지는 과정이라 여겨
느긋하게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제안 하나>

한국 정도는 아니지만 몽골에서도
14세기 유라시아 지도를 그리면서
고려를 몽골의 속국인 듯 그려놓아
코리안들을 속 상하게 하고
위대한 몽골의 조상들을 욕보이는
모자란 이들이 가끔 보이더이다.
이제 그들과 소중화의 제자들을
함께 긴 휴가를 보내 드립시다.

* 가까운 글부터 거꾸로 올립니다.
먼저 글은 뒤에 걸어놨으니 이어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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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군벌' 이성계, '친명 사대' 노선 택한 까닭

[기고] 한국사 왜곡의 주역, 이성계와 정도전

                                                                     김운회 동양대 교수


한국에서는 한족(漢族)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랑캐로 가르친다. 만주족이나 몽골인도 모두 오랑캐인 것은 물론 한국인은 자신도 한족이 불러준 예맥(똥고양이)이라는 애칭(?)의 오랑캐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특이한 일이다. 실제로 몽골, 만주, 한국인들은 큰 차이가 없는 민족이다. 만주에서 보면 압록강과 두만강이 만주와 한반도와의 경계가 아니라 백두산을 중심으로 서로는 선양(瀋陽), 북으로는 지린(吉林), 남으로는 평양, 함흥 일대까지가 거의 하나의 풍광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만주와 몽골인들을 한국인과는 전혀 다른 종족으로 더럽고 믿을 수 없는 오랑캐로 가르친다. 한족(漢族)은 특히 북방 민족들을 적(狄)이나 호(胡), 흉(匈), 맥(貊), 융(戎), 예(穢) 등의 용어로 지칭하며 비하했는데 그 이면에는 북방인들을 그만큼 무서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면 한국인들이 왜 이렇게 자존심도 없이 스스로를 비하하면서까지 북방인들을 천시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극단적이고 한족 중심주의적 중화사상인 성리학(性理學)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성리학이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된 것은 조선(朝鮮)이다. 따라서 조선 시대 이후 이 같은 경향은 매우 심각해졌다. 따라서 조선 건국 이데올로기를 기초한 정도전(鄭道傳)은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물론 그 시대적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지만 명나라가 안착하고 조선도 안정화되었을 때도 중국에서도 사라진 성리학으로 극단적으로 무장해간 것은 ‘역사적 이성’의 상실일 분만 아니라 정신사적으로 비극이다.      

이성계도 몽골 군벌

눈을 돌려 북방사 특히 몽골과 만주의 역사가 극심히 왜곡된 이면에는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의 책임은 없을까? 한국에서의 북방사 왜곡은 이성계의 출신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윤은숙 교수(강원대)의 저서인 <몽골제국 만주 지배사(소나무, 2010)>에 따르면, “원이 망해가며 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귀순하기 직전까지 근 백년간의 그들의 조상과 그들은 몽·원제국 옷치긴 분봉왕 휘하의 엄연한 몽골국인이었다.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실록 총서>에 따르면,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는 삼척에서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 동북면 일대를 근거지로 구축했고, 1255년에 옷치긴(Otchigin : 斡赤斤) 왕가를 통해 몽골제국에서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직위를 받았다. 다루가치는 몽골족이 아니고는 좀처럼 잘 주지 않는 고위 군관직이라는 점에 있다. 13∼14세기 동북 만주지역을 장악했던 옷치긴 왕가는 이 방대한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대칸들은 개경과 심양에 각각 개성 왕씨 부마왕을 분봉왕으로 세워 옷치긴 왕가의 과도한 비대화를 견제하였다.(교수신문 2007.2.5)”고 한다.

분명한 사실은 이성계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고려가 아니라 원나라 국민이었다는 것이다. 즉 이성계는 원나라에 속하는 옷치긴 제국의 휘하의 고위직 군관이었다는 것이다.

옷치긴 왕가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면, 옷치긴(Otchigin) 즉 테무게옷치긴(1168∼1246)은 칭기스칸의 막내 동생인데 매우 용맹스러운 사람으로 칭기스칸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현재의 아무르강 일대에서 한반도 북부까지 다스린 제왕이다.  

몽골 대평원을 통일한 칭기스칸에게 당시에 가장 큰 적은 공교롭게도 텝텡게르(Teb Tenggeri)라는 샤먼(무당)이었다. 유목민들에게 샤먼은 신(神)과 같은 존재로 칭기스칸의 개혁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이곤 했는데[주1] 칭기스칸에게는 ‘목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칭기스칸이 그를 제거하기도 어려웠다. 이 일은 맡은 사람이 바로 옷치긴이다. 이 때문에 칭기스칸은 옷치긴에게 제왕들 가운데 가장 큰 지역을 다스리게 했고[옷치긴 울루스(Ulus : 제국)의 성립], 자신이 서방원정(1219∼1225)을 떠날 때에 국정운영을 맡길 정도로 신임이 깊었다. 옷치긴 왕가는 13세기에서 14세기까지 유목과 농경을 모두 할 수 있는 땅을 받음으로써 제왕들 가운데는 가장 큰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옷치긴 울루스(제국) 윤은숙(2010 : 105)에서 재구성
[옷치긴 울루스(제국) 윤은숙(2010 : 105)에서 재구성]

옷치긴 사후 2대 왕은 타가차르(塔察兒)이다. 타가차르는 쿠빌라이의 최대 정적이었던 아릭부케(阿里孛哥)를 격파하여 쿠빌라이가 황제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주2], 쿠빌라이칸(원 세조)의 명령에 따라 항상 원정에 나서는 등 원나라 조정에서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멍케칸(헌종)이 1254년 고려 정벌 시에 예구와 타가차르를 파견하기도 했다.

1264년 쿠빌라이가 등극하여 황제위에 오르자 가장 큰공을 세운 사람이 타가차르였다. 그래서 타가차르는 원 세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서 “항상 쿠릴타이(일종의 화백 제도)에 참석하여 중대한 국사(國事)를 논의하였으며 매우 존경을 받았다.(<집사>)”고 한다.[주3] 당시 타가차르는 독자적으로 원나라 조정의 법도를 어겨가면서 자신의 관할권이 있는 지역에 사신도 파견하고 민호도 소집하기도 할 정도로 힘을 가지고 있었다.[주4]  

바로 이점에서 옷치긴 제국은 원세조(쿠빌라이칸)에게 가장 강력한 우방인 동시에 가장 두려운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윤은숙 교수는 심양왕 제도도 옷치긴 제국의 남하(南下)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옷치긴 왕가가 원나라 ― 고려 사이에 위치하면서 고려까지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이것을 중간에서 차단하기 위해서 심양왕을 두어서 서로 충돌시켜 옷치긴 제국의 영향력을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주5]

결국 원 세조가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1287년 옷치긴 왕가의 4대 제왕인 나얀(乃顔 : 타가차르의 손자)은 원세조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대항하여 동방의 제왕들과 반란을 일으켰다.[주6] 원 세조는 고령(73세)에도 불구하고 직접 정벌에 나서 나얀을 처형하였다.(1287)

나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 충렬왕은 원 세조에게 즉각 지원군을 파견하여 동북지역의 안전을 일부 담당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얀의 잔당들이 상대적으로 허약한 고려로 몰려오면서 사태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충렬왕은 다시 원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1291년에야 반란이 진압되어 고려는 안정을 찾았다.  

옷치긴 울루스의 귀족 이성계 가문

옷치긴 울루스(제국)은 이로써 다소 약화되었다가 1316년 요왕(遼王) 톡타(Toqta)가 임명되면서 다시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주7] 바로 이 시기에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이 태어났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가문은 이성계(李成桂, 1335~1408) → 아버지는 이자춘(李子春, 1315~1361 : 환조) → 할아버지는 이춘(李春 : 도조) → 중조부 이행리(李行里 : 익조) → 고조부 이안사(李安社 : 목조) → 이양무(李陽武)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문제는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와 그의 자손들이 주로 살았던 곳은 함경도 또는 현재의 옌지(延吉) 지역으로 이 당시는 고려 땅이 아니라 몽골의 영토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성계가 몽골인이었음을 당연할 것이다.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이춘은 보안테무르, 아버지 이자춘은 울루스부카라는 등의 몽골이름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원나라가 멸망(1368)하기 전 34년 전에 태어난 이성계에게도 몽골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주8]

이성계 선조 정착지(좌)와 고려 말의 정치 지도(우) : 교육부검정(2001) 역사부도 ㈜ 금성 재구성
[이성계 선조 정착지(좌)와 고려 말의 정치 지도(우) : 교육부검정(2001) 역사부도 ㈜ 금성 재구성]

[그림 ➁]에서 보면 이성계의 선조들이 정착했던 지역은 현재의 옌지(延吉)나 두만강의 북부 지역 또는 함경북도 지역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안사(李安社)는 전주(全州)에서 170호를 거느리고 삼척을 거쳐 두만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가 원의 개원로에 소속된 남경(南京) 즉 현재의 옌지(延吉) 성자산성(城子山城)의 오동(斡東)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주9]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255년 이안사는 몽골제국의 산지(散吉 : Sanji) 대왕(몽골의 장군)의 도움을 받아 원나라로부터 남경 등지를 지배하는 수천호(首千戶)겸 다루가치 직위를 하사받았다.[주10]

당시의 천호장이나 다루가치는 그 지역을 관할하는 몽골 제왕들이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고, 임명하고 난 뒤 중앙정부로부터 허락을 받는 형태였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산지가 이안사를 다루가치로 임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옷치긴의 손자인 타가차르 대왕이 관할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산지라는 사람은 타가차르 대왕과 가까운 인물로 추정된다.[주11] 만약에 이안사가 몽골인이 아닌데도 다루가치로 임명되었다면, 타가차르 대왕의 두터움 신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안사가 고려에서 이주한 사람이고 그 시기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이안사의 다루가치 임명은 역사적 미스터리다. 고려의 이주민인 이안사가 언제 어떻게 거대한 영역을 다스리는 타가차르 대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 시기 즉 1255년 이후 원나라는 본격적으로 고려 전역에 주둔하기 시작하였고, 그 주둔 범위가 압록강에서부터 익산, 담양, 해양(海陽 : 광주), 나주, 목포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고려로서는 큰 위기 상황이었다. 당시 고려 조정은 원나라와 연줄을 닿기만 해도 그를 이용하여 원나라와의 외교 교섭에 동원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려 출신의 이안사가 그 정도의 유력인사였으면 고려 조정에서 그를 모를 리도 없었을 터인데 이안사는 <고려사>에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안사의 아들인 이행리는 <고려사>에 한번 등장하는데, 일본 정벌을 위해 파견된 홍다구(洪茶丘, 1244~1291)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즉 홍다구는 1281년 제2차 일본정벌 때 우승(右丞) 실도(實都)와 4만 군사를 이끌고 일본 정벌에 나섰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행리의 출신에 대한 애매한 서술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고려사> 편찬 과정에서 일부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즉 <고려사>에 “(1281년) 3월 갑인에 원나라 정동행중서성 우승과 홍다구가 고려로 왔는데, 그때 우리 익조(翼祖) 또한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이행리가 원나라 관리이므로) 동북면으로부터 고려 국왕을 뵙기 위해 재삼에 이르렀는데, 매우 공손하여 충렬왕이 말하기를 ‘경은 본래 사족(士族)이니 어찌 근본을 잊겠는가? 이제 경의 행동거지를 보니 족히 마음의 소재을 알겠도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주12] 충렬왕이 이행리에 대하여 “그대는 원래 선비 가문의 사람이니 어찌 그 근본을 잊겠는가?”라는 기록 하나로만 이성계 가문 전체를 고려인으로 담보해야하는 상황이다.

1290년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는 다른 천호장들과의 불화로 옌지 지역의 기반을 상실하고 쌍성총관부의 함주(咸州 : 함흥)로 이주하였고, 1300년 다시 원나라로부터 쌍성 등지의 고려군민들을 다스리는 다루가치로 임명되었다. 또 이 직위는 그대로 이자춘에게 세습되었다. 이것은 이성계 집안 자체가 옷치긴 왕가와 긴밀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려는 전 통치 기간을 통해서 이 지역을 제대로 다스린 적이 없고 특히 원나라 이후에는 옌지(延吉)에서부터 함주(함흥) 등의 지역에 대한 정치력을 한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 후일에 공민왕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길주까지 진출하여 오늘날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는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의 가문은 설령 그 선조가 전주(全州)에서 출향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수세대에 걸쳐 여진화(女眞化) 또는 몽골화된 귀족으로 봐야한다.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이춘(李椿)은 원나라로부터 아버지 이행리의 천호(千戶) 관직의 계승과 함께 발안첩목아(勃顔帖木兒)라는 몽골식 이름을 받았으며 이자춘(李子春)을 낳고 의주에서 화주(和州: 함흥 인근)로 옮겼다. 이자춘은 함경도 쌍성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며 원나라의 천호(千戶)로 있다가 1355년(공민왕 4)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 조정에 내알(來謁)하여 소부윤(少府尹)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바로 이 시기를 즈음하여 개경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이 때 이성계의 나이는 이미 20세가 넘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사실상 몽골의 귀족으로 봐야한다. 즉 이성계의 가문은 5대째 몽골의 고위 관직을 가진 군벌 세력이었던 것이다.[주13] 그리고 이성계 가문이 다스린 지역은 대부분 여진인(만주족)이었고 이성계 가문의 주축군도 여진인(만주족)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주14]

1355년경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이 고려에 귀부한 시기는 이미 원나라의 국력이 쇠약하여 후일을 기약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328년 원나라는 이른바 ‘천력(天曆)의 난’[양도내전(兩都內戰)]이 발생하여 카이산파의 엘테무르(연철)와 이순테무르파[태정제(泰定帝)파]인 톡타(요왕) 사이에서 유혈 충돌이 일어나 칭기스칸의 황금씨족(종실)의 내분이 심각하게 일어났다. 이 시기 원나라에서는 전성기를 지나 황위 계승에 따른 치열한 권력투쟁이 일상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설상가상으로 1342년 이후에는 천지지변이 많아 황하가 대범람하여 하남, 산동 등의 지역이 황폐화되었고 후일 명나라의 건국 세력인 백련교도(주원장)의 반란이 창궐하여 이미 남중국에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특히 1360년 아르카이 테무르(오고타이의 후손)가 반란을 일으켜 많은 몽골의 제후들이 호응하여 원나라 조정을 어지럽혔고, 강남을 장악한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1368)하면서 동시에 군대를 몰아, 대도(베이징)에 밀어닥쳤다. 1368년 7월 원나라의 혜종은 상도[上都 : 이전의 카이펑(開平)으로 현재 내몽골 중부의 시린궈러멍(錫林郭勒盟)]로 피신하였다.

이와 같이 이자춘(李子春)이 귀부한 10여년 동안의 기간은 원나라의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극에 이른 상황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이자춘은 “보다 안전한” 고려쪽으로 터를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에 있어서 이성계 가문의 전주(全州) 본관 문제도 다시 제대로 검정해봐야 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가문이 확실히 고려 가문이라면 어떻게 천호장과 다루가치를 누대에 걸쳐 세습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성계와  청태조(누르하치 아이씬조러)는 별로 다르지 않다. 청태조의 고향은 백두산으로 정확히는 함경도 종성 또는 중국 옌벤(연변)·룽징(龍井)의 하왕산 지역이라고 한다.[주15] 만약 이성계가 고려 사람이라면 청태조는 조선(朝鮮) 유민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의문 투성이의 이성계 가문 : 이성계 가문은 만주인 또는 몽골인

이성계의 직계 조상으로 알려진 이린(李隣 또는 李璘)은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의 후손이라고 한다.[주16] 이린은 대장군 이용부(李勇夫)의 아들로 고려 제18대 의종(毅宗)때 시중(侍中)을 지낸 문극겸(文克謙)의 사위이다. 이린은 이성계(李成桂)의 6대조이며, 아들은 이양무(李陽茂)이며, 손자가 이안사(李安社)라고 한다. 그런데 이린은 고려 무신정권의 실력자인 이의방(李義方)의 동생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고려사>(卷128, 列傳41, 叛逆2)에 나와 있다. <고려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① 이용부의 아들은 이준의(李俊儀), 이의방, 이린 등이고, ② 이린이 이의방의 동생이며 ③ 이린은 명문 출신의 문극겸(文克謙)의 사위라는 것이다.(<高麗史> 文克謙列傳도 동일함)

이성계가 이린의 후손이라는 것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제외하면 다른 정사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도 이린의 이야기는 없고 이안사(李安社)부터 찬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사>에서는 이인(李隣)으로 <선원선계(조선 왕실의 족보)>에는 이린(李璘)으로 되어있어 한자(漢字)가 다르다.

나아가 <고려사>에는 “명종 4년(1174) 12월 계해일(癸亥日)에 이린(李隣)을 집주(執奏)로 임명했다.”고 했지만 <고려사>의 다른 부분에는 “(1174년) 이의방이 우연히 선의문(宣義門) 밖으로 나오자 정균(정중부 아들)이 몰래 승려 종참(宗旵) 등을 부추겨 이의방을 뒤따라 가다가 그를 살해하게 한 후, 이의방의 형제(이준의, 이린) 및 그 일당 등을 체포해 모두 죽였다.(”義方偶出宣義門外, 仲夫子筠, 密誘僧宗旵等, 托有求訴, 隨義方後, 伺隙斬之. 分捕俊儀兄弟及其黨高得元·柳允元等, 皆殺之“<高麗史> 卷128, 列傳41, 叛逆2)”라고 하여 앞의 기록과 맞지 않다.

그리고 <고려사>에는 이린의 아들로 주장되는 이양무(李陽茂, ?~1231년)에 대하여  “고종 8년(1221) 4월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최선단(崔先旦)이 과거 급제자 이양무(李陽茂) 등 86인을 선발했다.(<高麗史> 志 國子試)”는 기록이 있는데 이해하기가 어렵다. 여기에 나타난 이양무는 실제로 이린이나 조선왕계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태조실록 총서>에는 분명히 이성계의 선조로 서술이 되어있다. 즉 이양무와 이린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고려사>에는 없고 다만 <태조실록 총서>에만 있다.

왜냐하면 이의방의 죽음으로 전체 혈족들이 몰살되었는데 설령 이양무 혼자 살아 남았다 해도 대역죄인으로 전주에 계속 있으면서 1221년 과거에 급제했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즉 <고려사>에 따르면, 이의방(李義方)과 이린(李隣)이 죽은 것은 1174년이고 이린의 아들로 주장되고 있는 이양무(李陽茂)가 과거에 급제한 것은 1221년인데, 만약 이린이 죽은 시점에서 이양무가 1살이었다고 해도 47세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된다. 만약 이양무가 10세만 되어도 이양무는 63세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된다. 그러면 이양무는 그의 아들인 이안사와 함께 언제 삼척으로 갔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조선의 <태조실록(太祖實錄)>에는 “(이안사는) 처음에 전주(全州)에 있었는데 그때 나이 20여 세로서, 용맹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다. (…) 산성 별감(山城別監)이 객관(客館)에 들어왔을 때 관기(官妓)의 사건으로 인하여 주관(州官)과 틈이 생겼다. 주관(州官)이 안렴사(按廉使)와 함께 의논하여 위에 알리고 군사를 내어 도모하려 하므로, 목조(穆祖)가 이 소식을 듣고 드디어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서 거주하니, 백성들이 자원하여 따라서 이사한 사람이 170여 가(家)나 되었다. (…) 때마침 그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새로 안렴사(按廉使)에 임명되어 또 (삼척으로) 오려고 하니, 목조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배를 타고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 : 함경도 덕원)에 이르러 살았는데, 백성 170여 호(戶)가 또한 따라갔고 (…) 고려(高麗)에서는 목조를 의주 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아 원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 원나라 산길 대왕(散吉大王 : [산지])이 와서 쌍성(雙城)에 둔(屯)치고 있으면서 (…)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에게 원(元)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하니, 목조는 1천여 호(戶)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기 어렵다.

즉 무엇보다도 이안사가 삼척으로 이주한 것은 20세 전후라고 하는데, 그가 지방관과 불화가 심하자 지방관이 군대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힘이 센 호족이었다는 것이 문제다. 더구나 이양무는 대역죄인(이린)의 아들인데도 과거에 급제했다거나 그 아들(이안사)은 전주라는 대도시에서 호족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이안사가 지역을 이주할 때마다 170호씩 이동하는 것도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지도자나 씨족장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농경민들의 행태는 아니다. 이것은 유목민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또한 고려에서 이안사를 의주병마사를 삼았다(<태조실록>)는 내용도 <고려사>에는 없다.

분명한 것은 이린(李隣) ― 이양무(李陽茂) ― 이안사(李安社) 등의 혈연관계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안사 이후의 행적과 후손들의 혈연적 연관성은 고도의 일치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안사가 함경도 덕원(의주) 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먼저 평양(平壤)의 백성들이 목조의 위세(威勢)와 명망(名望)을 듣고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산지(散吉 : 몽골 장군)가 크게 기뻐하여 예절을 갖추어 대우함이 매우 후하였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즐거이 술을 마시었다. (…) ‘이 뒤로부터 서로 잊지 말도록 합시다.’하더니 (…) 명년 을묘(1255)에 산길이 이 사실을 원(元)나라 황제에게 알리니, 원나라에서 이안사를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태조실록 총서(太祖實錄 總序)>)”는 기록은 전혀 신뢰할 수 없다.  

인터넷이 있는 시대도 아닌데, 이안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평양(平壤)에서 이름도 없는 이안사를 흠모하여 함경도 쪽으로 따라온다거나 옷치긴 왕가의 실세였던 산지(散吉 : 산지) 대왕이 “연회가 끝나려 할 적에 친히 옥배(玉杯)를 목조(이안사)의 품속에 넣어 주면서 말하기를, ‘이 뒤로부터 서로 잊지 말도록 합시다.’라고 맹세하고(<太祖實錄 總序>)” 다루가치로 임명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산지(散吉) 대왕 이 이안사를 다루가치로 임명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안사는 몽골인이거나 만주족(여진) 가운데 몽골제국에 크게 협조한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고려 입장에서는 고려인 가운데 몽골의 다루가치가 될 정도로 중요 인사라면 고려 조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로 각종 외교 로비에 등장하였을 터인데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즉 이안사는 <고려사>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다루가치는 아무나 임명되는 것이 아니며 고려에서 금방 이주해온 이안사를 당시 옷치긴 왕가의 실세였던 “산지 대왕이 원나라 조정에 천거하여 다루가치가 되게 했다.”는 <태조실록 총서>의 기록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만약 이안사가 애초부터 그 지역에 뿌리를 내렸던 여진계의 몽골 귀족이었다면 충분히 수긍이 가겠지만, 근거도 없는 이주민에게 고위벼슬을 하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성계와 나하추

이성계를 정통 몽골 귀족이라고 의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자춘과 나하추(納哈出)와의 관계 때문이다. 이들 두 사람은 상당히 친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하추는 원나라 초기 공신(功臣)인 무칼리(木華黎)의 후예로, 대대로 요동(遼東)지방의 군사적 책임을 맡았던 집안에서 태어나 원나라 말기에는 심양(瀋陽)을 근거지로 만주지역을 다스렸다. 1362년(공민왕11) 2월 나하추는 쌍성(雙城 : 현재 함남 永興)을 치고자 수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으나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이성계에게 참패하고 달아났다. 이 이야기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제35, 36, 38장)와 <납씨가(納氏歌)>에 잘 나타나 있다.[주17]

고려는 나하추에게 정1품의 벼슬을 내리기도 하였다. 만약 나하추가 고려의 벼슬을 받고 그대로 귀화하면서 나주(羅州) 나(羅)씨의 성을 받았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조를 건설했다면, 이성계와 같은 결과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하추는 원나라가 동북으로 쫓겨 갈 당시 성립된 북원(北元 : 기황후의 아들이 초대 황제임)을 도와 요동지역과 중원 회복을 위해 투쟁하다가 주원장의 고립정책으로 결국 명나라에 투항하였다. 이후 만주 지역의 원나라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북원은 멸망의 길을 걸었다.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에 따르면, “이성계가 (나하추의) 말을 쫓아 추격하니 ‘이보게 이 만호, 두 장수끼리 어찌 이리 핍박하는 것이오?’ (…) 후에 나하추가 사람을 통해 왕에게 말을 바치고 (…) 나하추가 말하기를 ‘이자춘이 지난 날 ’나에게는 제주 있는 아들이 있다더니 과연 거짓말이 아니었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나하추와 이자춘이 매우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주18]  

이성계와 이자춘이 원나라가 망해가는 걸 보면서 고려에 투항했고, 이성계가 고려 귀족화 되는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 했다면, 자신의 출신을 더욱 은폐해야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결국 친명(親明)·반원(反元)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나라는 이미 기울었고 명나라는 중원을 통일한 신흥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몽골 귀족이 아니라 전주 이씨(李氏)로 뿌리를 내리게 되면, 더욱 원나라와는 철저히 절교(絶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고려에는 정치적으로 복잡한 보수 세력과 신진 세력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었다. 친원 - 친명, 대토지 소유 - 중소지주, 성리학 - 비성리학 등으로 각 분야별로 대치하던 정치세력의 이합집산도 심화되고 있었다. 이 틈새를 뒤집고 들어간 것이 바로 정도전(鄭道傳)이었다.
  
이성계는 원명 교체기에 자신의 군벌 모태인 원나라로부터 결별하고 독립하면서 재빨리 고려 국내의 친원파(親元派)를 적으로 돌려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신흥 명나라와 손을 잡아, 고려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안정적으로 승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대외관계 노선을 선택했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하자, 바로 그 이듬 해 고려도 신속하게 원나라와의 관계를 정리하였다. 즉 고려는 원나라 연호 사용을 정지하고 원나라를 북원(北元)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1369).[주19] 북원은 북상하는 명나라의 15만 대군을 섬멸한 후(1372), 고려에 대해 합동 군사작전으로 중원(中原)을 회복하자는 요청을 여러 차례 보내왔으나 끝내 고려는 침묵하였다.[주20] 물론 당시 국제정세로 보아, 고려의 선택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1384년 이후에는 명나라가 북원의 사신이 다니는 길을 봉쇄해버렸기 때문에 통교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원나라 황실은 긴 세월의 은혜를 저버리고 두터웠던 ‘구생(舅甥 : 장인과 사위)의 은혜’를 배반한 고려에 대해서 크게 실망을 하였다.  

윤은숙 교수는 “결국 몽ㆍ원 제국이 죽어 넘어진 시신위에서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 2대 제국이 태어나는데, 하나는 1368년의 주원장의 명나라고 다른 하나는 1392년의 이성계의 조선국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주21] 따라서 고려계(?) 몽골군벌 가문 출신인 이성계가 개국한 조선조는, 친명사대(親明事大)에 강하게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고 이것은 조선조를 통틀어 나타나게 된다.

조선이라는 명칭도 그래서 정한 것이다. 즉 정도전은 조선의 건국 이념을 정리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이성계의 “조선은 기자조선의 계승자라는 의미로 국호를 조선으로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600년 동안 조선을 기자를 계승한 나라로, 중화의 충실한 외변(外邊)으로 자처했다. <조선경국전>에는 “우리나라는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 (고구려·백제·신라·고려 등은) 모두 한 지방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 침탈만 일삼았으니, 비록 그 국호가 있다 해도 쓸 것이 못 된다. 오직 기자만은 주나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 … (명나라 천자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권고하시니) … 이는 아마도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을 전하여 권한 것이니, 그 이름이 이미 정당하고 말은 순하다.” 라고 썼다.[주22]

조선은 한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국호가 아니라, 중화(中華)의 신하인 기자를 기리기 위한 국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명적(親明的) · 친한족적(親漢族的) · 모화적(慕華的)이었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왜곡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나라는 없어져도 중국과의 의리를 지켜야한다?

한국에서는 고려와 몽골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더욱 부정적이다. 원나라는 사실상 세계의 지배자였고 고려인들은 원나라의 정치에 직접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일방적이었고 종속의 정도는 더 심했으며 조선인들이 명나라의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었다.

조선은 중국에서도 사라진 성리학(性理學)을 국학으로 하여 이데올로기(ideology)로 삼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의례(儀禮)의 근간으로 하여 통치철학의 기본으로 건국한 나라였다. 명나라 성화(成化) 연간에 편찬된, 주자의 사상을 집대성한 구준(丘濬)의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전 8권 : 1465)을 적극 수용하여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였다.[주23]

우리에게는 학문의 스승으로 각인된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등은 비생산적인 <주자가례>를 더욱 발전시켜 <성학십도(聖學十圖)>,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성학집요(聖學輯要)>, <가례집람(家禮輯覽)>,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등을 저술하여 이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조선은 성리학(주자학)을 국가 정교(政敎)의 기본강령으로 채택하여, 주자학에서 말하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는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하는 국가적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주자학은 송대(宋代)의 시대의 산물이었고, 송나라 때 이루어진 <주자가례>가 당시 조선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많은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야기시켰으며 그것이 결국 조선으로 하여금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사회가 정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스스로 중화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하더니 급기야 “중국(명)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요, 오랑캐(청)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의 원수입니다. (…) 차라리 나라가 없어질지언정 (중국과의) 의리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윤집 「척화론(斥和論)」]”라고 하기도 하고 “오로지 우리 동방(東方)은 기자(箕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肅宗實錄> 7-1-3). (…)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오시어 홍범(洪範)의 도로써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夷]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송시열의 말 : <肅宗實錄> 9-2-12).”라고 하는 등 역사적 이성(理性)을 상실해갔다.      

즉 조선의 대표적 충신(忠臣)이라는 자가 “중국은 부모(父母)고 우리 나라가 없어져도 중국과의 의리를 지켜야한다.”고 하지를 않나, 한국의 유학의 성인급(聖人級)으로 분류된 동방거유(東方巨儒)라는 자는 “한국은 중국에 의해서 오랑캐의 티를 벗고 새끼 중국이 되었으니 그 은혜가 만대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이 사람들이 민족의식(民族意識)이나 역사적 이성이 없어 생긴 결과가 아니라 성리학이나 중화사상으로 무장하면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주자학)이 위험한 것은 성리학을 제외한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이단(異端)과 사교(邪敎)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조선은 사회경제적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고 인문과학적 사회에서 안주하는 환경을 만듬으로써 미래의 비전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서유럽은 근대 이성으로 무장하고 부국강병의 길로 가고 있는데 조선은 시대를 역행하여 결국은 식민지의 길을 갔다.

이와 같이 조선은 철저한 사대 모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원류와는 단절을 도모하였고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조선의 국왕이 된 이성계 자신의 정치적 실체를 은폐하려는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몽골 군벌이었던 이성계가 조선 국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당시 고려인들이 몽골과 고려와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고 몽골군벌이 조선의 왕이 되는데에 대한 저항감이 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당시 ‘사실상 유일한 독립국’ 고려와 세계의 지배자인 원나라의 친밀한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성계가 몽골 군벌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이해가 되지만, 이성계의 무력을 이용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던 세력들이 민족의 원류인 북방민들을 지나치게 오랑캐로 천시하는 정치, 사회, 문화적 환경을 만든 것이 문제이다. 이것이 한국 역사 전체를 왜곡하고 오늘날 민족의 정체성의 혼돈을 초래한 원인이다.  

[본문 주석]

[주1] 예컨대 칭기스칸의 가족사를 기록한 <몽골비사>에 보면, 아홉 개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텝텡게르에게 모여들었다고 한다. 유원수譯 <몽골비사> (혜안, 1994) 215쪽.
[주2] 옷치긴 울루스(Ulus : 제국)의 2대 제왕인 타가차르는 새 황제로 쿠빌라이(원 세조)를 선택함으로써 동방의 왕가들이 일제히 쿠빌라이편에 가담한 것이다.
[주3] 라시드 앗딘 <칭기스칸기> (김호동 譯註) (사계절, 2003) 91쪽.  
[주4] 그래서 몽골 침공 초기에 고려가 저질의 공물을 바치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서  사신 저고여를 통해 엄청난 공물을 징수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고려의 무신 정권이 대몽항쟁을 강화하는 구실이 되기도 했지만 당시 옷치긴 울루스에서 요구한 공물은 실제로는 몽골 조정과는 무관하게 옷치긴 울루스 자체에서 부과한 것으로 판단된다.
[주5] 윤은숙 <몽골제국 만주 지배사(소나무, 2010)> 20쪽.
[주6] 나얀(乃顔)은 칭기스칸의 막내동생 테무게오치긴의 현손(玄孫)이다. 하이두(海都)가 원 세조(쿠빌라이)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동방의 여러 영주들도 반란에 가담하였는데, 이 당시 나얀이 맹주였다.
[주7] 叢佩遠 <中國東北史>(吉林文史出版社, 1998) 396쪽.    
[주8] 주채혁 <순록치기가 본 조선·고구려·몽골(혜안, 2007)> 참고
[주9] 배재홍「조선 태조 이성계의 高祖 穆祖 李安社와 삼척」<朝鮮史硏究> (朝鮮史硏究會, 2003) 9쪽
[주10] “명년 을묘에 산지(散吉 : Sanji)가 이 사실을 원나라에 알리니, 원나라에서 오동 천호소를 세우고 금패를 하사하여 남경(南京) 증의 지역에 5천호 이상을 다스리는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다루가치를 겸하게 하였다.”<朝鮮王朝實錄> 太祖實錄總序
[주11] 윤은숙, 앞의 책, 274∼276쪽.
[주12] 甲寅元遣征東行中書省右丞忻都茶丘來. 時我翼祖亦以朝命自東北面來見王至于再三益恭益虔王曰: “卿本士族豈忘本乎? 今觀卿擧止足知心之所存矣.” <高麗史> 29卷-世家29-忠烈王2-1281.
[주13] 즉 이안사, 이행리, 이춘, 이자춘, 이성계 등은 원나라의 천호(千戶) 겸 다루가치 지위를 세습하여 함주, 등주, 화주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기 때문에 몽골 귀족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구진 「여진과의 관계」<한국사> 22(국사편찬위원회,1995) 331쪽.  
[주14] 윤은숙, 앞의 책, 280∼281쪽.
[주15] 박진관 <신간도 견문록> (예문서원, 2007) 292쪽.
[주16] 조선의 <태조실록 총서>에 “이한(李翰)이 이자연(李自延)을 낳았다. 이자연이 이천상(李天祥)을 낳고, 이천상이 광희(光禧)를 낳고, … 대장군(大將軍) 이용부(李勇夫)를 낳고, 이용부가 내시 집주(內侍執奏) 이인(李隣)을 낳고, 이인이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이양무(陽茂)를 낳고, 이양무가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안사(李安社)를 낳으니, 이 분이 목조(穆祖)이다.”로 되어있다.
[주17] <납씨가(納氏歌)>는 이성계가 고려 공민왕(恭愍王) 11년(1361) 28세 때 동북방병마사가 되어 나하추(納哈出)를 격퇴한 사실을 칭송한 노래.
[주18] <朝鮮王朝實錄>「太祖實錄總序」, <高麗史> 卷133 恭愍王世家 40
[주19] <高麗史> 卷133 恭愍王世家 41 공민왕 18년 8월 丙戌.
[주20] 구체적으로 원나라 혜종(토곤 테무르)과 기황후도 고려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고(1368), 명나라 대군을 격파했던 아유시리다라칸(기황후 子)의 조정에서도 “옛 주인(故主)의 의리가 중하고 구생(舅甥 : 장인과 사위)의 은혜가 두터운데, 가히 배반할 수 있겠는가? 고려왕은 진실로 생각을 고치어 황제의 명령(上命)에 부응하여 군사를 가다듬고 말을 먹이어 (원나라와) 함께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서 우리 국가(원나라)의 중흥(中興)의 사업을 도울 수 있도록 하라.”고 하면서 고려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1376). <東國通鑑> 卷50 高麗紀 辛禑 2年 丙辰年.
[주21] 윤은숙 「조선창업, 과연 한반도의 자생적 산물인가」교수신문(2007.2.5) 및 윤은숙 <몽골제국 만주 지배사> (소나무, 2010)
[주22] <朝鮮經國典>「國號」
[주23] <주자가례>는 <문공가례(文公家禮)>라고도 하는데 후인들이 주자의 이름을 빌어 편찬한 책이라는 설도 있다. 고려 말 주자학과 함께 한반도에 전래되었다. 명(明)나라 성화(成化)연간에 구준(丘濬)이 <주자가례>를 기초로 하여 의절고증(儀節考證) 등을 추가하여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 8권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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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기황후>, 30부까지 사실이 없다

<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⑩

                                                                     김운회 동양대 교수


문화방송(MBC) 드라마 <기황후>는 기황후의 실제 삶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드라마 <기황후>에서의 기황후는 실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기황후의 이름이 '기승냥'이니 '기양의'이니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기황후가 무사(武士)나 자객(刺客)도 아니었고 왕유라는 인물도 허구의 인물이다. 기황후는 자진하여 후궁(後宮) 시험에 지원한 사실도 없으며, 혜종과의 사랑 싸움도 한 적이 없다.

적어도 드라마 <기황후> 30부까지 묘사된 기황후에서, 기황후와 관련된 부분에는 사실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 기황후라는 인물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기황후, 역사상 대표적인 신데렐라  

기황후(奇皇后)는 원나라 혜종(惠宗)의 황후로 몽골 이름은 얼제이투-코톡토(完者忽都, Oljeitu-Khutugtu)이다. 그동안 기황후의 삶에 대해서 역사는 관대하지 않았다. 기황후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몽골인의 입장에서 기황후의 집권이 원나라 멸망의 원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의 입장에서 기황후의 혈족들이 고려에 큰 피해를 주었으며 기황후 혈족들이 몰살되자, 군대를 몰아 고려를 침공했다는 점에서 매국노(賣國奴)라는 것이다.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몽골에 간 고려 여인 중 비빈(妃嬪)이나 황후(皇后)의 반열에 오른 사람 가운데 기황후의 가계(家系)가 가장 미약했다고 한다.(주1) 따라서 그녀가 황후가 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신데렐라'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중요한 사건이다. 현대적 개념으로 보면 기황후는 매우 적극적이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캐릭터로 세계 역사상 가장 입지전적 인물로 봐도 될 것이다.

기황후에 대한 기록은 <원사(元史)> 권114 후비 열전 중에 수록된 기사 이외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일 1368년 혜종이 북으로 쫓겨 간 이후 기황후의 행적은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른 기록들은 후비 열전을 그저 보완하는 수준이다.  

<원사>에 따르면, 얼제이투-코톡토(完者忽都 : 후일 기황후)는 고려인으로, 황태자  아유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을 낳았다. 그녀의 가문은 미천했지만, 그녀가 후비가 되고 나서 고려에서 지위가 높아졌다. 당시 기씨(奇氏) 3대가 모두 왕의 작위를 추봉(追封) 받았다고 한다.(주2) 얼제이투-코톡토(完者忽都)가 신데렐라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당시 휘정원사(徽政院使) 투만데르(禿滿迭兒)였다. 투만테르가 얼제이투-코톡토를 혜종에게 궁녀(宮女)로 추천하였고, 얼제이투-코톡토는 음료와 차(茶)를 접대하는 일을 맡았다. 얼제이투-코톡토(完者忽都)는 빼어나고[頴] 영리하여[黠] 날이 갈수록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후에 엘테무르의 딸인 타나시리(答納失里:Tana-Shiri)가 황후가 된 후에 이 사실을 알고 얼제이투-코톡토(完者忽都)를 질투하여 여러 차례 채찍질하기도 하면서 그녀를 심하게 괴롭혔다.(주3)


▲ 기황후(기씨 문중화). ⓒ김운회

혜종이 황위에 오르는 시기를 전후로 원나라 황실을 이끌어 가는 두 실력자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킵차크 출신의 엘테무르(연철)였고 또 한 사람은 바얀(伯顔:Bayan)이었다. 엘테무르는 문종의 황후와 협력하여 혜종의 아버지인 명종(쿠살라)을 독살하여 권력을 장악하였고 이 때문에 혜종의 옹립에 반대하여 더 어린 아들인 녕종을 황위에 올려 사실상 섭정을 한 것이다. 그러나 녕종이 바로 죽자 할 수 없이 엘테무르는 혜종을 황위에 올렸는데 자기가 명종을 독살하였기 때문에 항상 두려워했다. 그래서 자기 딸인 타나시리(答納失里:Tana-Shiri)를 헤종의 황후에 앉혔지만, 엘테무르가 죽자 바얀이 실권을 장악하였고 엘테무르 가문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기황후, 권력의 중심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혜종(순제)은 아버지(쿠살라 : 명종)를 살해한 원수의 딸(타나시리)을 사랑할 수가 없었고, 어여쁜 고려여인 기황후를 편애했다고 한다. 타나시리는 엘테무르 사후 2년만에 역모죄(逆謀罪)로 피살(1335)되었고 혜종이 승상 바얀(伯顔)과 함께 원나라 조정을 정상화시켰다. 바로 이 시기에 혜종의 총애를 받아온 얼제이투-코톡토(完者忽都)가 황태자인 아요르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Ayur-Siridara : 북원의 초대 황제)를 낳았고(1339), 서서히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혜종은 얼제이투-코톡토(기황후)를 황후로 세우고 싶었다. 그런데 승상 바얀이 얼제이투-코톡토가 정통 황후족이 아니라 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당시 원나라의 황실은 옹기라트(弘吉刺) 가문 출신에서 정실 황후를 뽑아야 한다는 불문율(不文律)이 있었다. 이것은 칭기즈칸 이후 지켜져 온 원칙이었다. 바얀은 원나라의 명문가인 옹기라트 출신이었고 정실 황후는 바얀의 딸인 바얀코톡토(伯顔忽都)가 되었다.

1339년 바얀(伯顔[백안])이 권력 남용으로 파직되자, 샤라반(沙剌班)이 얼제이투-코톡토를 제2 황후로 삼을 것을 주청하여, 얼제이투-코톡토는 흥성궁(興聖宮)에서 살게 되었고, 얼제이투-코톡토는 자신을 신데렐라로 만들어 준 휘정원(徽政院)을 자정원(資正院)으로 개명하여 자신의 권력의 기반으로 삼았다.(주4)  

얼제이투-코톡토 즉 기황후(奇皇后)가 자정원을 장악하던 시기는 혜종의 친정 시기이며 명재상 톡토(脫脫[탈탈])가 조정을 이끌면서 원나라 문화의 최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이를 '지정신정(至正新政)'이라고 한다. 원나라는 그동안 수많은 궁중 쿠데타와 암살, 독살, 의문사로 점철된 내분의 시기를 수습하고 일시적으로 안정된 통치기에 접어들었다.

기황후, 황후의 모범을 보이려 노력하다

기황후는 자중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기황후는 틈틈이 여성들을 위한 <효경(孝經)>과 <사서(史書)>를 찾아 읽으면서, 역대 황후들의 어질었던 행장(行狀)들을 찾아서 궁중의 내명부의 모범으로 삼아 규율과 법도를 세웠다. 기황후는 천하에서 귀한 음식이 올라오면 태묘[太廟 : 宗廟(종묘)]에 먼저 올려 제를 지낸 후 먹는 등 스스로 내명부의 모범이 되려고 노력하였다.(주5)

이러한 노력과 함께 기황후는 자정원(資政院)에 자기의 심복인 고려인 고용보(高龍普)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았고 여기에 고려 출신 환관들은 물론 몽골 출신 고위관리들도 끌어들여서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아들 아요르-시리다라(당시 14세)를 황태자로 책봉하는 데 성공했다(1353).

기황후의 심복인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朴不花:PakBukha[박보카])도 기황후의 후광으로 자정원사가 되었다. 원래 자정원(資正院)은 황후의 재물(財物)과 부세(賦稅)를 관리감독하는 기구였다.(주6)

1353년 아요르-시리다라가 황태자로 책봉이 되는 시기는 기황후의 남편인 혜종(순제)이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음사(淫奢)와 방중술(房中術)에 빠지게 되는 시기였다.(주7) 이 같은 궁중의 흐름과는 대조적으로 기황후는 1358년 대도에 큰 기근이 들자 각 관서에 명하여 죽을 만들어 공급함으로써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주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황후는 금은(金銀)과 곡식 및 비단을 내어 기근으로 인하여 발생한 많은 희생자를 위해 도성의 11개 문에 묘역(墓域)을 설치하고 10여 만 명을 장사지내 주었다. 여기에 승려들에게 명하여 수륙대회(水陸大會)를 열어 안타깝게 죽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주8) 이 일에는 박불화가 실무적인 모든 일을 관장·처리하였다.(주9)

한편 이 당시 장강(長江 : 양쯔강) 이남(以南) 지역이 남송(南宋) 이후 더욱 많이 개발되면서 풍부한 물자를 중앙정부에 공급하여 원나라 재정의 대부분을 충당하였다. 그러나 원나라는 장강 이남의 사람들은 '남인(南人)'이라 하여 차별하여 강남지역의 과거 사족(士族)들의 공분(公憤)을 샀다. 해적들이 장강(長江)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1344년에는 기근이 휩쓸었고, 1351년에 백련교도를 주축으로 한 '홍건적(紅巾賊)'이 봉기하고, 장강 일대가 이들의 세력권이 되면서 정세(政勢)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같이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인데 혜종은 정치에 권태를 느끼고 있어서 원나라는 점점 나락으로 빠지고 있었다(이로부터 불과 10년 만에 원나라가 멸망했다).   기황후와 황태자 아요르-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는 긴급하게 황제의 선위(禪位)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혜종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장성한 황태자가 황위를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황후는 박불화(朴不花)를 승상 태평(太平)에게 보내 협의하려 했지만 워낙 심각한 사안이라 태평은 응하지 않았다. 기황후는 다시 태평(太平)을 황궁으로 불러 친히 술을 하사하면서 여러 차례 청하였지만 태평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일이 혜종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혜종은 크게 노하여 두 달 동안 기황후를 보지 않았다.(주10)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원사>의 다른 기록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즉 "이때에 혜종이 황제에 있은 지가 오래된 반면, 황태자는 나날이 성장하여 군군(軍國)의 사무를 모두 황태자가 결정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기황후는 황태자의 선위를 도모하여 박불화로 하여금 그 뜻을 승상 태평(太平)에게 알렸지만 태평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1360년 태평이 파직되고, 오직 초스칸(搠思監)이 승상으로 있게 되었다."(주11) 이때부터 기황후는 자기 심복인 박불화와 초스칸 승상을 통하여 중앙권력을 장악해가기 시작했다.  
기황후가 혜종에게 황태자에게 황위를 물려 줄 것을 종용한 것은 혜종이 정치에 권태를 느끼면서 각종 운기술(運氣術)에 빠져 있었고 이미 대부분의 국사를 황태자가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위(禪位)를 논하는 자체가 대역무도(大逆無道)한 일이기 때문에 기황후와 같이 강력한 세력을 가진 황후가 아니면 추진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정치 권태기에 빠졌더라도 혜종은 기황후의 요구를 거부했고, 이 일로 인하여 황태자 반대파와 지지파 사이에 내전(內戰)이 일어난 것이다. “

내전의 발발에는 초스칸과 기황후의 심복인 박불화의 책임이 크다. 즉 <원사>에 는 "이때(1360년 전후) 황제가 정치에 더욱 염증을 느끼게 되자, 박불화는 그 틈을 타 정권을 잡고 초스칸과 서로 협력하여 국사를 주관하였다. 그 과정에서 전국 각지에서 접수되는 경보(警報)와 장군과 대신들의 논공행상 등을 모두 전횡하여 혜종이 (직접) 듣지 못하게 하니 원나라 조정이 안팎으로 분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박불화의 세력이 견고해지면서 이들 세력이 마치 들불이 타듯 거세어져 사람들을 핍박하니, 내외 백관들 가운데 이들에게 귀부한 자가 열에 아홉이었다."(주12)고 한다. 이것은 기황후의 심복인 박불화로 인하여 이 원나라 조정이 크게 분열되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조정의 분열에는 기황후의 책임이 분명히 클 것이다.

1360년 아르카이 테무르(오고타이의 후손)가 반란을 일으켜 많은 몽골의 제후들이  이에 호응하여 조정이 시끄러웠다. 이어 1364년 7월, 볼로테무르(孛羅帖木兒)가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자, 황태자는 도성을 빠져나가 기녕(冀寧)으로 몸을 피하면서 볼로테무르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볼로테무르는 감찰어사(監察御史) 무기종(武起宗)를 통해 황제에게 "기황후가 국정을 어지럽히니 황후를 내쫓아야 합니다."라고 아뢰었으나 혜종은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다음 해(1365) 3월, 볼로테무르는 황제의 교지를 위조하여 기황후를 유폐시켰다. 이렇게 기황후는 반(反)황태자파의 지도자 볼로테무르에 의해 포로로 잡힌 것이다.

1365년 4월 볼로테무르는 기황후를 협박하여 다시 궁으로 돌아가게 한 후, 황후의 인장(印章)을 빼앗고 황후의 서찰을 위조하여 황태자를 궁으로 불러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황태자가 궁으로 돌아오지 않자, 기황후는 다시 유폐되었다. 이때 박불화는 피살되었다(주13). 기황후는 미인계(美人計)로 이 상황을 탈출하려 시도하여 볼로테무르에게 여러 차례 미녀를 바치니 100여 일이 지나 비로소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황태자의 옹립 과정에서 황태자파와 반황태자파의 내전은 황태자 지지자인 쿠쿠테무르(廓擴帖木兒)가 대도를 회복하면서 수습되었다(1365). 볼로테무르가 죽고, 기황후는 황태자를 불러 대도로 돌아오게 하였고, 쿠쿠테무르(廓擴帖木兒)에 명하여 황태자를 옹위하여 성에 들어오게 하였다. 기황후는 쿠쿠테무르의 군사를 동원한 뒤, 혜종을 급박하여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황태자에게 양위(讓位)하십시오."라고 종용하였지만, 쿠쿠테무르는 기황후에 협조하지 않고 회군하여 대도를 떠났다. 황태자는 쿠쿠테무르를 원망하였다.(주14)

한편, 탁발승이었던 주원장(朱元璋)은 혼란의 시기에 접어들자 안휘성에서 봉기한 홍건적 곽자흥(郭子興)의 부하로 들어가 곽자흥 사후(1355) 실권자가 되었고, 송(宋) 황실의 후예로 자처하던 홍건적 수령인 한산동(韓山童)의 아들인 한림아(韓林兒)가 소명왕(小明王)이라는 이름으로 송(宋)을 세우자 이에 호응하여 부원수가 되었다. 주원장은 이를 바탕으로 더욱 세력을 키워 드디어 집경(集慶 : 현재의 난징)을 점령하고 '응천부'로 개명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1356). 당시 홍건적 내부에는 3대 군벌(장사성, 진우량, 주원장)이 있었는데 주원장은 이들을 모두 격파하고 각지의 군웅들을 굴복시키고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 명태조 주원장(타이완 박물관 소장). ⓒ김운회

당시 홍건적들은 원나라와의 일전(一戰)을 불사(不辭)하여 북벌(北伐)을 하다가, 오히려 원나라의 토벌로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여러 유학자들(송렴, 유기, 장일, 섭침)의 조언으로 원나라의 강병들과의 전쟁을 피하고 강남을 평정하여 힘을 길렀다. 주원장은 집경(난징)을 점령하고 난 뒤, 10여 년을 홍건적들의 북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치전(political war)에 집중하여 "구축호로 회복중화(驅逐胡虜 恢復中華 : 북방 오랑캐를 물리치고 중화를 회복한다)"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새왕조 개창의 명분을 얻었다. 그래서 1356년에서 1367년까지 원나라 세력들과 강력한 홍건적 군벌들이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모두 약화되어 주원장은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었으며 이것이 명나라 건국의 힘이 되었다. 1367년 홍건 군벌(軍閥)들 사이의 결전에서 최종 승리한 주원장은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는 대명(大明), 연호는 홍무(洪武)라고 했다.

황제에 즉위한 주원장은 즉위와 동시에 군대를 몰아 대규모의 북벌(北伐)을 단행하였다. 주원장의 북벌군은 20여만의 대군으로 서달(徐達, 1332~1385)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대도(베이징)를 압박하였고, 이에 혜종은 대도를 버리고 북으로 떠났다. 이로써 원나라는 역사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1368년 7월 원나라의 혜종은 상도(上都)로 피신하였고 기황후는 혜종을 따라 북으로 갔다.

이상이 기록으로 추적할 수 있는 기황후의 실제 모습이다. 그 동안 일부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에서 기황후를 마치 요부(妖婦)의 대명사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사실과 아니다. 기황후에 대한 평가는 기황후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혜종의 평가가 가장 정확할 것이다.

혜종과 기황후, 끝없는 사랑

혜종은 긴 세월 동안 기황후를 깊이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기황후를 대황후(제1 황후)로 세우진 않았다. 1365년 실권도 없던 바얀코톡토(伯顔忽都) 대황후가 사망하자 많은 신하들이 기황후를 대황후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청하였으나 혜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會伯顔忽都皇后崩,十二月,中書省臣奏言,后宜正位中宮,帝不答."<元史> 卷114 后妃 列傳) 그러나 혜종이 기황후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 혜종이 기황후에게 준 보물들과 서책에서 혜종은 기황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 고려인 솔랑카(肅良合)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이 나라에 와서 짐을 받들어 섬겼다. 너는 항상 조심하고 삼가면서, 낮밤으로 언제나 신망이 두텁고 성실하였다. 너는 긴 세월을 생활은 검소하고 사람들에게는 공손하게 아랫사람들을 이끌어 왔다."(주15)

라고 하였다. 혜종은 기황후가 상서로운 기상을 타고나 황태자가 태어났음을 감사하였다. 혜종과 기황후 사이에 태어난 아요르-시리다라(Ayur-Siridara, 愛猷識理達臘)는 바로 북원의 1대 대칸인 빌릭토-칸(Biligtu Khan) 즉 소종(昭宗)이다. 그래서 황실의 종친들과 대신들이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주청하였으나 오히려 기황후가 이를 완강히 사양한 것으로 되어있다. 기황후는 실제로 무리하게 대황후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혜종은  "지난날을 돌아보면, 중관(中宮)의 지위가 마땅히 현명한 처(妻)인 너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 황실의 종친들과 대신들이 모두 너를 황후에 봉하라고 간청하고 있다. 액정(掖庭)의 궁녀들도 모두 너를 존경하여 따르고 있다. 그런데 너 기씨는 여러 차례 겸손하게 이를 사양하니, 너 뜻이 더욱  가상하다."(주16)라고 하면서 옥으로 된 책(玉冊)과 보물(玉寶)을 주었다. 이어 기황후를 대황후로 삼을 것을 명하면서 "아! 너는 궁정의 일들을 신중하게 다스려, 충심으로 짐을 더욱 더 잘 보좌할 수 있도록 힘써라. 너의 아름다운 말과 행실을 더욱 환하게 밝혔고 계속 이어나가서, 함께 우리 조정의 홍복(洪福)을 보존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주17) 즉 기황후는 바얀코톡토(伯顔忽都) 대황후가 죽은 후, 1365년에 비로소 원나라의 대황후가 되었다.  

이상을 보면, 혜종이 기황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까다로운 종친들이 불문율을 깨뜨리면서까지 기황후를 대황후로 옹립했다는 것은 기황후의 행실이 황후로서는 매우 모범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양위(讓位)와 같은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일을 추진했던 기황후에 대해서도 용서하고 대황후로 삼았던 것은 기황후에 대한 혜종의 깊은 애정을 보여준다. 기황후도 대도가 공격을 당하자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북으로 갔고 그 아들이 다시 북원(北元)의 초대황제가 된 후에도 별말 없이 살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혜종의 조서(詔書)에는 기황후가 항상 조심하고 삼가면서, 신망이 두텁고 성실하였고 생활은 검소하고 사람들에게는 공손하게 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혜종은 기황후를 현처(賢妻)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의 기록으로만 본다면, 원나라 황후로서 기황후는 명재상 톡토와의 갈등과 박불화를 통한 권력의 전횡(專橫)을 제외하면 황후 자체로서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기황후의 원나라 조정 장악은 내전을 유발하여 원나라의 멸망을 촉진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 부분은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당시의 상황이 있다. 혜종은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남중국은 이미 홍건적의 세력하에 있는 상태에서 기황후는 좀 더 강력한 황권(皇權)으로 원나라를 중흥시키려 했는데 이에 대해 원나라 내부에서 반발이 터져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기황후의 실책으로 거론되고 있는 고려에의 침공도 봉건시대의 도덕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해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 사건을 <원사(元史)>와 <고려사>로 따라가 보자.

고려에 있던 기황후의 가족들이 그 권세만을 믿고 교만하여 고려왕(공민왕)이 노하여 모두 죽여 버렸다. <고려사>에서는 공민왕이 교서를 내려 "지금 기철·노책·권겸 등과 같은 자들이 원나라 조정에서 위로하고 구원해 준 뜻과 우리 선조들께서 나라를 세워 왕통을 잇게 해주신 법도를 무시한 채 자기 권세를 믿고 임금을 능멸했으며 위세를 함부로 부려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이 끝이 없었다. 나는 그들이 원나라 황실과 인척임을 감안해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불만을 품고 몰래 반역을 도모하여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으려 했다."라고 하고 있다.(주18)

1356년 세계 제국을 다스리던 황후의 일족이 몰살을 당했으니 기황후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년이 흐른 후 1363년 기황후가 황태자에게 "너는 어찌 나를 위해 복수해 주지 않느냐?"라고 다그치니, 황태자는 당시 대도[京師]에 머물러 있던 고려의 왕족을 새왕으로 삼고, 기씨 일족의 아들인 산부루(三寶奴)를 원자(元子)로 삼으려 하였다. 황태자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최테무르(崔帖木兒)를 승상으로 명하고 그로 하여금 병력 1만 명과 일부 왜병(倭兵)을 동원하여 함께 고려로 들어갔다.(주19) 그런데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자 사방에서 고려의 복병들이 일어나서 크게 패하여 불과 17명의 기병(騎兵)만이 살아 돌아왔다. 기황후는 이를 크게 수치스러워하였다고 한다.(주20)  

기황후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도 많은 연구와 분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듯이 기황후를 마치 요부(妖婦)처럼 묘사한 것은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기황후는 원나라 황실을 기준으로 보면, 모범적인 황후였으며 절제(節制)의 운신(運身)으로 그나마도 원나라가 유지되는 데 일조를 한 것으로 봐야 한다. 다만 기씨 가문의 멸족으로 고려를 침공한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도 기황후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돌릴 수는 없고 기씨 일족의 책임이다. 세계의 주인인 원나라 실권자인 기황후와 황태자가 조공국인 고려의 공민왕에게 충성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기황후가 반원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공민왕을 폐위시키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여자와 결혼하여야 명가(名家)
  
그동안 몽골에 대한 연구자들의 견해들을 종합해 보면, 몽골인들이 유난히도 고려인들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당시 세계의 주인이었던 원나라의 지배층들은 세계의 대부분의 여성들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와 결혼동맹을 추진한 것은 일반적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고려여인들이 상대적으로 미인(미인)이라서 그럴 것이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몽골 서부 지역은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터키 등에 이르는 지역으로 동서양의 피가 어우러져 세계적인 미인(美人)의 나라들이다.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미인의 모습에 대해 강요를 받지 않는 한, 자기와 닮은 사람들 가운데서 미인을 찾는 것이 보편적이다. 따라서 몽골인들이 고려인들을 좋아했다는 것은 몽골과 고려인과의 어떤 동질성(同質性)을 떠나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 동질감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살펴보았다.

원나라 때에는 몽골군들은 포로로 잡은 고려 여인들과 결혼하는 것은 다반사이며 사신은 물론 다루가치, 둔전병에 이르기까지 고려 여자를 아내로 삼으려는 풍조가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당시 원나라의 벼슬아치들은 고려여인들과 결혼하고 거실에는 고려청자, 나전칠기를 장식하고 고려먹, 고려 종이를 사용하며 고려 화문석을 깔고 사는 것이 유행이었고 고려인삼(高麗人蔘)은 진시황이 찾는 불사약(不死藥)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주21) 그래서 <경신외사(庚申外史)>에서도 "(원나라) 대신과 귀인들은 고려 여인을 얻은 후에라야 명가(名家)라고 불렸다 … 여러 곳에 늘린 의복과 신발, 모자 및 기물(器物)이 모두 고려의 모습을 따랐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정이 "지금 고려의 부녀가 후비(后妃)의 반열에 있는 이도 있고 왕후(王侯)의 귀인(貴人)으로 된 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경대신(公卿大臣)이 고려의 외손자 출신이 많습니다. 이들은 본국의 왕족과 문벌, 부호의 집안에서 특별히 조지(詔旨)를 받들고 온 여인, 혹은 자원해 온 여인, 또는 중매를 통해 온 여인들입니다."라고 하였다.(주22)

혜종과 기황후 사이에 태어난 아요르-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는 북원(北元)의 1대  황제인 소종(昭宗)인데, 중요한 점은 소종의 황후도 권황후(权皇后)로 고려인(高丽人)이었고 1370년에 황후로 책립(册立)되었다는 것이다.

기황후에 가려진 또 한 사람의 황후

원나라 황실에 시집간 비빈급 고려 여인들 가운데 기황후에 가려진 중요한 인물이 또 있다. 바로 인종(仁宗:Ayur-Baribad, 1285~1320)의 후비였던 바얀-코토크(伯顔忽篤, Bayan-Khutug)다. 바얀-코토크는 충선왕의 비(妃)인 순비順妃 허씨(許氏)의 따님으로 충선왕의 비인 순비(順妃)가 충선왕과 결혼하기 이전에 낳은 딸이다. 즉  바얀 코토크의 계부(繼父)가 충선왕이다. 원래 순비 허씨(?∼1335)는 과부(寡婦)였다가 충선왕의 눈에 띄어 충선왕의 비(妃)가 되어 순비(順妃)로 책봉되었다(1308). 순비 허씨는 허공의 딸로 처음엔 평안공 왕현에게 시집가서 3남 4녀를 낳았는데 왕현이 죽은 후 태자인 충선왕에게 개가(1308)하였고, 충선왕이 등극하자 순비로 책봉되었다. 충선왕과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충선왕은 원래 원 세조의 손녀인 부타시리(계국대장공주)와 결혼을 했지만 부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충선왕도 충렬왕처럼 몽골 공주(부타시리 왕비)를 멀리하고 여러 후궁들을 거느렸는데 그 가운데서 조비를 가장 총애하였다. 그러나 조비의 어머니가 부타시리 왕비를 저주한다는 등의 소문이 돌아서 부타시리 왕비는 조인규와 그의 아내, 가족들을 잡아 가두고, 몽골에도 이 사실을 알렸고 결국 이 사건과 지나친 개혁 정치로 인하여 충선왕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7개월 만에 폐위당하고 충렬왕이 복위되었다. 그 후에도 충선왕은 고려 여인들을 사랑하여 주로 숙비(淑妃)와 순비(順妃)를 총애하였다.

인종의 후비인 바얀-코토크는 이 순비의 따님인데 후비로 임명되자, 순비에게 많은 고급 의상과 선물을 보내어 충선왕을 사로잡도록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충선왕이 숙비를 멀리하고 자기의 어머니인 순비를 더 사랑하게 하도록 많은 힘을 쓴 것이다. 순비의 연적(戀敵)은 숙비(淑妃)였는데, 이런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충선왕이 순비를 더 사랑해주지 않자, 충선왕을 티베트로 귀양보낼 정도로 숨은 실력을 발휘했다고 한다.(주23)


▲ 고려인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사람들. ⓒ김운회

숙비(淑妃)는 원래 충선왕의 아버지인 충렬왕의 부인이었다. 원나라나 고려 후기에서는 이런 식으로 아버지의 후궁을 다시 아내로 취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흉노(匈奴)의 전통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을 농경민의 시각에서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도 당태종(唐太宗)과 당고종의 비(妃)였고 당 현종은 자기 며느리인 양귀비(楊貴妃)와 결혼하였다. 이것도 당 황실이 유목민(선비)의 후예이기 때문에 나타난 일이다. 측천무후는 637년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의 후궁으로 입궁하였고 당태종이 죽자 무후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하였다가 고종(高宗, 재위 649~683)의 후궁으로 다시 입궁하였고, 황후를 내쫓고 황후가 되었다. 고구려나 부여의 결혼 풍습가운데 형사취수혼(兄死娶嫂)도 농경민에게는 악행 중의 악행이지만 유목민들에게는 일반적인 유풍이었다.  

세 황제의 사랑을 받은 고려 황후 다마시리 황후

태정제(泰定帝:Yesun-Temur, 1293~1328 : 진종, 재위 5년)의 황후 다마시리(達麻實里, Damashiri)는 고려인이었다.(주24) 다마시리는 고려시대의 명문가의 후예로 할아버지인 김주정(金周鼎, 1228~1290)은 과거에 장원 급제한 명재상이었고, 아버지인 김심(金深, 1262~1338) 역시 3번이나 정승에 임명될 정도의 문벌귀족이었다. 1323년 태정제는 쿠데타를 일으켜 영종(英宗)을 살해하고 대칸에 즉위한 인물이다. 몽골 전문가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다마시리 황후는 세 황제를 모신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만큼 권력이 강했다는 의미도 된다.

<고려사>에는 "(태정)황제는 화평군(化平君) 김심(金深)의 딸인 다마시리를 황후로 삼았다. 이전에 그녀는 인종의 편비(偏妃)였다."고 한다.(주25) 즉 다마시리 황후는 인종의 편비이자 태정제의 황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의 기록을 보면, "(1309년 3월) 대사헌(大司憲) 조서(趙瑞)가 원나라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참리(參理) 김심(金深)을 고려도원수(高麗都元帥)로 임명하고 조서를 부원수로 임명하였다. 당시 김심의 딸이 황제에게 입시(入侍)하여 총애를 받았으며, 그뿐만 아니라 조서의 딸도 뽑혀 원나라의 총신에게 시집갔으므로 고려 조정은 이와 같이 임명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주26) 이 기록은 다마시리가 이미 1309년 무종(武宗:Khaisan, 재위1307~ 1311)의 비빈으로 책봉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다마시리는 무종 ― 인종 ― 태정제의 비빈으로 세 사람의 원나라 황제를 남편으로 둔 매우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세계의 주인 세 사람을 남편으로 두었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주목할만한 사실은 태정제의 병이 위독한 상태에서 다마시리가 황후로 책봉되었고, 당시 조정의 최고 실력자가 엘테무르(燕鐵木兒)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마시리는 엘테무르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사람일 것이다. 엘테무르는 무종(武宗)의 숙위(宿衛)로 10여 년을 복무하면서 총애를 받았고, 태정제 사후 무력으로 무종의 아들인 문종을 옹립했다.


▲ 왼쪽부터 무종 - 인종 - 태정제(원대 그림). ⓒ김운회

그리고 다마시리는 원나라의 정사(政事)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고려 조정에도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주27) 어떤 의미에서는 기황후보다도 더 큰 영향을 행사했을 가능성도 있고 <드라마>로써는 더 재미있는 소재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원나라 황실에서 고려 출신의 황후급의 인물들 가운데 주요한 세 분의 일대기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기황후(얼제이투-코톡토) 이전에도 바얀-코토크(伯顔忽篤, Bayan-Khutug)나 다마시리(達麻實里, Damashiri-Khatun)와 같은 인물들이 원나라 황실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기황후의 등장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 황실에서 고려인에 대한 유별난 정서를 가지게 된 것은 멀리 칭기즈칸과 쿨란 공주, 메르키드와 고려를 동일시하는 역사적 전통과도 깊이 연관되어있다. 당시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겠지만 그 동안 필자의 연구들을 토대로 보면 몽골은 분명히 고려를 '형제의 나라'로 인식할만한 충분한 근거들이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이 몽골과 한국이 형제라는 의식을 가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본문 주석]

(주1) 구체적인 내용은 박원길 <배반의 땅, 서약의 호수> - 21세기 한국에 몽골은 무엇인가(민속원, 2008) 37쪽.
(주2) "完者忽都皇后奇氏,高麗人,生皇太子愛猷識理達臘。家微,用后貴,三世皆追封王爵." <元史> 卷114 后妃 列傳.
(주3) "初,徽政院使禿滿迭兒進爲宮女,主供茗飮,以事順帝.后性頴黠,日見寵幸. 後答納失里皇后方驕妬, 數箠辱之."  <元史> 卷114 后妃 列傳.
(주4) "答納失里旣遇害, 帝欲立之, 丞相伯顔爭不可. 伯顔罷相, 沙剌班遂請立爲第二皇后, 居興聖宮,改徽政院爲資正院." <元史> 卷114 后妃 列傳.
(주5) "后無事, 則取《女孝經》史書, 訪問歷代皇后之有賢行者爲法. 四方貢獻, 或有珍味, 輒先遣使薦太廟, 然後敢食." <元史> 卷114 后妃 列傳.
(주6) "皇后愛幸之,情意甚膠固, 累遷官至榮祿大夫,資正院使,資正院者,皇后之財賦悉隸焉." <元史> 卷204, 列傳91, 宦者. 朴不花
(주7) 1353년 혜종의 측근인 하마가 서천(西天)의 중[僧]을 비밀리에 혜종에게 천거했고 이에 덩달아 투루테무르(禿魯帖木兒 : 하마의 매부)도 역시 서번(西蕃)의 중[僧]인 가린천(伽璘真)을 혜종에게 천거하였다. 이 승려들이 얀셰르파(演揲兒法)라고 하는 대희락(大喜樂)의 방중술을 원나라 황실에 퍼뜨린 것이다.
(주8) "至正十八年(1358), 京城大饑, 后命官爲粥食之. 又出金銀粟帛命資正院使朴不花於京都十一門置冢,葬死者遺骼十餘萬,復命僧建水陸大會度之."<元史> 卷114 后妃 列傳.
(주9) 1360 4월이 되자, 앞뒤로 매장된 사람이 20만 명에 이르렀고, 당시 들어간 돈(鈔)이 2만 7,090여 정(錠)이었고 쌀은 560여 石이었다. 뿐만 아니라 또, 대비사(大悲寺)에서 수륙대회(水陸大會)를 사흘동안 밤낮으로 열어, 무릇 병든 백성들에게는 약을 공급하였고, 장례를 치를 수가 없는 형편의  사람들에게는 관(棺)을 지급하였다. 당시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장저(張翥)는 이 일을 기리는 글을 지었는데, 이를 선혜지비(善惠之碑)라고 하였다. 원문은 "至二十年四月,前後瘞者二十萬,用鈔二萬七千九十餘錠,米五百六十餘石.又於大悲寺修水陸大會三晝夜,凡居民病者予之藥,不能喪者給之棺.翰林學士承旨張翥爲文頌其事,曰善惠之碑."<元史> 卷204, 列傳91, 宦者. 朴不花
(주10) "時帝頗怠於政治,后與皇太子愛猷識理達臘遽謀內禪,遣朴不花諭意丞相太平,太平不答. 復召太平至宮, 舉酒賜之, 自申前請, 太平依違而已, 由是后與太子銜之. 而帝亦知后意, 怒而疏之, 兩月不見."<元史> 卷114 后妃 列傳.
(주11) "於是帝在位久,而皇太子春秋日盛,軍國之事,皆其所臨決.皇后乃謀內禪皇太子,而使不花喻意於丞相太平,太平不答.二十年,太平乃罷去,而獨搠思監爲丞相"<元史> 卷204, 列傳91, 宦者. 朴不花.
(주12) "時帝益厭政,不花乘間用事,與搠思監相爲表裏,四方警報,將臣功狀,皆抑而不聞,內外解體,然根株盤固,氣焰薰灼,內外百官趨附之者十九.又宣政院使脫歡,與之同惡相濟.爲國大蠹."<元史> 卷204, 列傳91, 宦者. 朴不花.
(주13) <원사>에 "곧 볼로테무르(孛羅帖木兒)는 투젠테무르를 궁궐로 보내면서 황제 측근의 사악한 세력을 척결해야한다고 선언하였다. 4월 12일, 청하(清河)에 머무르고 있을 때 … (투젠테무르는) 초스칸(搠思監)과 박불화를 넘겨주면 반드시 군대를 물리겠다고 하였다. 혜종은 그들의 기세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여 할 수 없이 두 사람을 잡아서 그들에게 넘겼고, 군대는 물러갔다. 박불화는 볼로테무르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한다 원문은 "未幾,孛羅帖木兒遣禿堅帖木兒以兵向闕,聲言清君側之惡.四月十二日,駐于清河,帝遣達達國師問故,往復者數四,言必得搠思監、朴不花乃退兵.帝度其勢不可解,不得已,執兩人畀之,其兵乃退.朴不花遂爲孛羅帖木兒所殺.事具搠思監、孛羅帖木兒傳."<元史> 卷204, 列傳91, 宦者. 朴不花.  
(주14)  "二十四年(1365) 七月, 孛羅帖木兒稱兵犯闕, 皇太子出奔冀寧, 下令討孛羅帖木兒. 孛羅帖木兒怒, 嗾監察御史武起宗言后外撓國政, 奏帝宜遷后出于外, 帝不答. 二十五年三月, 遂矯制幽于諸色總管府, 令其黨姚伯顔不花守之. 四月庚寅, 孛羅帖木兒逼后還宮, 取印章, 僞爲后書召太子. 后仍回幽所, 後又數納美女於孛羅帖木兒, 至百日, 始還宮. 及孛羅帖木兒死, 召皇太子還京師, 后傳旨令廓擴帖木兒以兵擁皇太子入城, 欲脅帝禪位. 廓擴帖木兒知其意, 至京城三十里外, 即遣軍還營, 皇太子復銜之." <元史> 卷114 后妃 列傳.
(주15) "咨爾肅良合氏, 篤生名族, 來事朕躬. 儆戒相成, 每勤於夙夜;恭儉率下, 多歷於歲年."<元史> 卷114 后妃 列傳.
(주16) "旣發祥元子於儲闈, 復流慶孫枝於甲觀. 眷若中宮之位,允宜淑配之賢. 宗戚大臣,況僉言而敷請 ; 掖庭諸御, 咸傾望以推尊. 乃屢遜辭, 尤可嘉尚."<元史> 卷114 后妃 列傳.
(주17) "今遣攝太尉某持節授以玉冊玉寶,命爾爲皇后. 於戲!愼修壼政, 益勉爾輔佐之心;昭嗣徽音, 同保我延洪之福."<元史> 卷114 后妃 列傳.
(주18) 國譯 高麗史 奇轍 (경인문화사, 2006) 네이버 지식백과.
(주19) 여기에서 말하는 왜병(倭兵)은 현재 일본지역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북부와 중국 해안지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말한다. 왜에 대한 개념은 김운회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동아일보사, 2010) 참고.  
(주20) "奇氏之族在高麗者, 怙勢驕橫, 高麗王怒, 盡殺之. 二十三年, 后謂皇太子曰 汝何不爲我復讎耶 遂立高麗王族人留京師者爲王, 以奇族之子三寶奴爲元子. 遣同知樞密院事崔帖木兒爲丞相, 用兵一萬, 並招倭兵, 共往納之. 過鴨綠水, 伏兵四起, 乃大敗, 餘十七騎而還, 后大慚."<元史> 卷114 后妃 列傳.
(주21)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7』(한길사, 2005)
(주22) "今高麗婦女,在后妃之列,配王侯之貴,而公卿大臣,多出於高麗外甥者. 此其本國王族及閥閱豪富之家,特蒙詔旨,或情願自來,且有媒聘之禮焉"(<高麗史>列傳「李穀傳」)
(주23) 박원길 <배반의 땅, 서약의 호수> -21세기 한국에 몽골은 무엇인가(민속원, 2008) 31쪽 참고.
(주24) 태정제는 진종(眞宗)이라는 묘호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태정제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1328년 태정제의 아들 천순제(天順帝)가 폐위됨으로 인해 시호가 추탈되었다.  
(주25) <고려사> 충숙왕 1328년 4월조:(泰定)帝封我化平君金深女達麻實里爲皇后,先是深女爲仁宗皇帝偏妃
(주26) <高麗史節要> :"(1309년 3월)大司憲趙瑞還自元,帝以參理金深爲高麗都元帥,瑞爲副元帥,時,深女入侍於帝得幸,瑞女亦被選適元寵臣故拜". <고려사> 에는 "(1309년, 3월)戊申,大司憲趙瑞還自元,帝以叅理金深爲高麗都元帥,瑞爲副元帥"처럼 김심과 조서의 관작임명에 대한 기록만 수록되어 있다. 박원길, 앞의 책 재인용.
(주27) 구체적인 내용은 박원길, 앞의 책,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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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⑨~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