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핵보유 시인
북한은 최근 핵무기 보유를 시인하였다. 이는 북한이 “우리는 핵개발 의도도 능력도 없다”고
주장해온 지금까지의 입장과 전면 배치된다. 핵 보유 시인은 북한 핵전략의 새로운 형태로,
한반도는 이제 엄청난 폭풍 속으로 진입되는 상황을 예고하고 있다.
핵보유와 핵개발 프로그램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핵개발 프로그램은 작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대통령 특사의 방북을 계기로 불거진 문제로, 한반도 전쟁 위기의 핵심 사안으로
부각되어왔다. 핵 보유를 시인한 베이징 3자회담(북·미·중, 4.23~25)은 핵개발 프로그램의
폐기를 둘러싼 회담 자리였다. 이 과정에서 8천여 개의 사용후 핵연료봉의 재처리 문제가
북핵 문제의 한계선(red line)으로 부각되는 듯 했다. 이는 6개월 내에 5~6개의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 추출과 관련된 사안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북한의 핵보유
시인으로 국제사회의 충격과 함께 한반도 핵위기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북한은 이미 보유한 핵무기는 제거(포기)할 수 없으나, 핵개발 프로그램은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북한의 핵전략은 국제적으로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는 한편, 핵개발 프로그램은 대가를 전제로 협상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은 ‘핵’을 보유했는가
NCND는 핵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관행처럼 인식되어왔다. 그런데 핵 보유에
대한 ‘비공식적 시인, 공식적 확인 거부’는 새로운 북한판 핵전략인 셈이다.
이스라엘은 200~300기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한번도 핵무기 보유를
공식적으로 시인한 적이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핵무기를 해체한 후에 그 존재를
시인했다. 그런데 핵무기 보유의 시인이나 선언과는 무관하게 이스라엘의 핵보유는
이미 공인된 사실이다.
북한의 핵무기 정책은 김일성의 핵개발에 대한 강한 의지 속에서 상당히 일찍부터
추진되었다. 1955년 4월 북한 과학원 제2차 총회에서 ‘원자 및 핵물리학연구소’
설치를 결정하였다. 1956년 3월, 소련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하여 드브나 핵연구소에
과학자를 파견·양성하기 시작하였고, 몇 해 후에 소련의 지원하에 소형 원자로를
착공할 수 있었다(1962.1). 그후 정무원 산하 원자력공업부 신설(1986.12)에 이어
제2원자로 시험가동에도 성공하였다(1987.2). 이 시기부터 북한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그후 1990년대 초부터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 요구와 거부의
숨바꼭질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북한의 원자력은 평화용이 아닌 핵무기 개발용으로 출발했다. 바로 이 점이 한국의
핵에너지 정책과 다르다.
북한 핵개발의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자.
우선 이승기(李升基)박사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일본 京都대학에서 합성섬유를 전공한
화학공학자로 월북후, 비날론 제조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1962년 레닌상을 수상하였고
모스크바대 강사를 거쳐, 1967년 북한원자력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했다.
도상록(都相錄)은 東京大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했으며, 京城대학에서 이공학 부장을
지낸후 북한에서 원자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정근(丁根)은 모스크바대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한 후 원자로 분야 전문가로 북한과학원
위원을 역임했다. 여경구는 몽양 여운형의 조카로 와세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였는데,
2차대전 말기 일본 V-Ⅱ로켓(독일제)연구부서 액체추진체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해방후 북한
과학계에서 연구활동을 하였다. 최학근은 모스크바 대학과 소련 드브나 핵연구기지 출신
핵공학자로 북한 정무원 산하 원자력공업부 부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지난해 망명한 것으로 알려진 경원하 박사는 ‘북한 핵개발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핵공학자(Nuclear Criticality 전문가)인 경 박사는 미국 로스알라모스 국립핵연구소에서
핵폭탄 제조에 참여하였고, 그후 캐나다 맥길대 교수로 재직중 입북(1974?)하여 북한
핵개발에 크게 기여했다. 미국의 한 국방 잡지는 94년 "80년대 북한의 영변 원자로
건설과 가동은 경 박사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소개했다.
이처럼 해방 전후 이미 뛰어난 핵관련 과학자들 이외에 해방 후세대 핵과학자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키운 북한의 핵관련 전문가와 기술자들은 적어도
수백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핵무장 추구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의 핵위협이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중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중국 본토
핵공격 검토 발표로 휴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후 미국의 핵무기 사용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되었다. 1959년 주한 UN 사령부는 미국의 대량핵보복전략에 따라 핵무기의
한국 배치를 발표함으로써 김일성은 미국의 핵위협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베트남전 종전후 술레징거 미국방장관의 한국의 핵기지화 제안(1975.5.1) 및 한반도
전술핵무기 배치 재확인과, 그후 북한 재침시 대북 핵무기 사용 가능이라는 전쟁억지용
경고성 발언(1977.7)은 북한의 위기 위식을 고조시켰다. 이에 자극받은 김일성은 “남들이
핵무기를 보유하면 우리도 겁낼 것 없다”며 핵에는 핵으로 대응한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최근에도 미국이 핵선제공격 대상(핵태세검토 NPR 보고서, 2002.1.8)에 북한을 포함시킴으로써
위기감은 한층 증폭될 수 밖에 없었다.
둘째, 대내적으로 강렬한 핵보유 의지를 들 수 있다. 핵무기는 남조선 해방의 최종적
수단일 뿐만 아니라, 김일성·김정일 우상화의 표현이다. 즉, 핵무기는 체제유지의 최후적
보루이다.
셋째, 핵무기는 최소 비용으로 가장 효율적인 군사력을 보유하는 방안이다. 여기에다
핵물질과 핵관련 기술 등은 외화벌이의 견인차적 역할을 하며, 궁극적으로는 한국, 미국,
일본 등에 대한 다양한 협상용 또는 협박용으로 활용할 수 있다.
핵보유 '추정'과 핵보유 '시인'은 엄청나게 다르다
지금까지 북한은 한 두개 핵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핵 보유 추정은 대개
북한의 IAEA 핵활동 보고서 제출 내용과 IAEA 사찰 결과와의 ‘불일치’에 근거한다.
북-미 기본합의(1994.10.21 제네바)는 북한의 향후 핵활동 전면 동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후 미국은 북한의 집요한 핵 보유 의지와 플루토늄 추출 가능성에 근거하여 북한의 핵
보유를 추정해왔다. 근래에 들어와 럼스펠드 국방장관, 딕 체이니 부통령 등은 미
정보당국의 판단에 기반하여 ‘북 핵무기 보유’를 몇 차례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와중에 돌출된 북한의 핵보유 시인은 북한의 절박한 상황을 반영하는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 미국의 북한 핵 실체에 대한 추정 단계를 넘어선 보다 분명한 정보, 증거
확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핵보유 ‘추정’과 핵보유 ‘시인’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핵보유 시인은 북한 핵의
실체를 더 이상 문제삼을 필요가 없는 단계로 상황이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북한 핵전략이 ‘협상’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여긴다면 위험
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 한켠에서는 “핵실험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핵보유 기정사실화는 곤란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러나 현재의 핵기술 수준에서 반드시 핵실험을 해야만 핵보유가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핵실험에 관련한 NCND 전략을 채택할 수 있으며, 핵실험은 핵사용 직전에 이루어질
수 있다. 만약 투하대상국에 직접 사용하겠다고 협박한다면 핵실험을 거치지 않은 핵무기라고
해서 안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라늄탄은 핵실험이 불필요하다. 또한 컴퓨터 모의실험도
핵실험을 대체할 수 있다. 더욱이 소형이면 지하 동굴에서 은밀히 실험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경우 파키스탄의 핵실험 자료로 실제 핵실험을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핵실험이 핵보유의 필요충분 조건은 아니다. 오히려 북한은 핵실험 의도 자체를
협박 또는 협상용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북한이 베이징 3자회담에서 핵실험을
뜻하는 ‘test’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핵실험이 필요불가결한 사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실험 의사(의도) 카드를 적절한 시기에 협상용, 협박용으로 꺼집어 낼 것이다.
북한 핵과 ‘저강도’ 전쟁
북한의 최대목표는 핵을 보유한채 미국과 불가침 협상을 체결하여 체제를 보장받는 한편,
한국과 일본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려는 데 있다. 그러나 핵을 가진 북한과의
공존은 최악의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미국측의 시각에서 북한의 핵보유를 용납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이
플루토늄을 판매할 수 있으며 둘째, 북한이 붕괴할 경우 관리가 느슨해진 핵무기가 군벌이나
정파의 손에 들어갈 수 있다. 셋째, 핵무기가 북한 정부의 손에 그대로 있다고 해도 북한은
핵무기 위협으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다고 보며, 넷째, 북한 핵보유는 동아시아의
한국·일본·대만의 도미노 효과를 낳아 모두 핵보유에 대한 강렬한 유혹을 갖게 되어 지역
긴장을 고조시키며, 다섯째, 북한 핵무장은 세계 핵비확산체제(NPT)에 심대한 타격을
가한다는 등의 요지로 압축된다.(애시턴 카터 예방방위계획(PDP)공동국장, <미국 상원 북핵
청문회 요약>, 연합뉴스, 2003.2.6)
그러나 우리가 김정일 정권의 핵을 용납할 수 없는 이유는 더욱더 심각하다. 북한의 핵보유가
공인되고 핵국가로서 국제적 지위를 얻게 되면 김정일 정권은 대남 ‘저강도’ 분쟁을
일상화시킬 개연성이 높다. 남한이 스스로 핵을 보유하거나 재반입된 주한미군의 핵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은 남한이 핵전쟁을 두려워하여 국지적 도발에 항상 소극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확신아래 김정일 정권의 내부적 위협이나 체제적 단합을
위해 저강도 분쟁에 호소하는 방식을 손쉽게 택할 수 있다.
핵보유 국가간 저강도 분쟁의 사례는 인도-파키스칸 전쟁을 들 수 있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지배에 대한 우려와 군사적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핵무기 보유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것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핵폭탄을 보유하게 되자 오히려 인도에 대한
대담하고 빈번한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였다.
파키스탄의 도발적인 군사적 조치는 인도가
제한적이나마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에게 전면적인 군사적 공격을 가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신념에 기초한 전략이었다. 즉, 파키스탄의 제한적 수준의 핵무기가 인도의 핵공격을
억제할 것이고, 파키스탄의 비합리적인 핵공격을 우려하여 인도의 반격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확신과 신념아래 파키스탄의 인도에 대한 군사적 도발은 억제하기
어렵게 되었다.
인도는 군사적 측면에서나 국력 차원에서 엄청난 우위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의 도전에 대한 단호한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핵보유 국가간 군사적 분쟁은 억제될 것이라는 가정은 환상임이 드러났다. 인도-파키스탄
분쟁은 ‘제한전쟁’의 신사고를 가져왔으며, 핵우산 아래서도 ‘제한전쟁’ 즉 ‘저강도’
전쟁이 일상화될 수 있다는 현실을 증명한 결과가 되었다.
김정일의 핵보유가 현실화될 경우 우리는 나날이 끔직한 사태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예컨대 과거의 경험을 준거로 한다면, 군사분계선 침략, 해상 도발, 영해·영공 무단침범,
도시게릴라 침투파괴 공작, 국가기간시설의 파괴 또는 파괴위협 등 온갖 형태의 침략과
협박으로 고통받을 것이다. 그런데도 확전으로 초래될 핵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은 단호하고
전격적인 대응전략의 선택을 어렵게 만들어 우리 국민들은 일상적인 전쟁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김정일 정권의 핵은 반세기 이상의 재래식 전력에 의한 전쟁 억지 전략을 완전히 무효화시켜
한국의 국방전략의 전면 폐기·수정을 요구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는 엄청난 국방
예산 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와 국방 관념 전체를 흔들어 국가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핵무기의 존재 과시로 남북관계를 일방적으로 끌고 가거나 협박성 대북지원을
요구하는 상황도 나타날 수 있다. 그리하여 김정일 정권이 마침내 핵무기 위협으로 한반도의 ‘해방’
의지를 구현하려 들 경우 우리 사회는 극한적인 위기 상황에 빠지게 되며, 그 최종적 결과는
민족공멸일 뿐이다.
북한 핵 : 충격과 분노의 세계, 느긋한 한국
한국의 핵불감증은 제3국의 입장에서 보면 불가사이한 현상으로 비친다. 그렇다면 북한의
핵폭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한국인의 ‘무신경과 배짱’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를테면 핵불감증은 어떤 요인에서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그야말로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도착적(倒錯的) 현상의 발로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핵불감증을 한국사회의 ‘친북좌익적’ 성향과 ‘보수우익적’ 성향 양측 모두에서 공
통적으로 나타나는 ‘정신병적’ 도착증세라고 본다. 이를 네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①친북좌익적 입장에서, NPT 체제 자체의 불공정성을 비난하고 나선다. “왜 강대국만 핵을
가지고 제3세계의 약소국이나 북한은 핵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말인가”라고 강변한다. 더욱이
주체국가 김정일 위원장이 ‘미제’의 세계패권 전략에 도전하여 국가 ‘자주성’ 차원에서 핵을
보유하려는 의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북한 핵문제를 비판하는 입장을 미국 편을 드는
사대적·반민족적 논리로 규정한다.
이는 냉전 후 미국의 '오만'과 일방주의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과 강대국 중심의 핵비확산체제의 불평등성에
대한 비판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강대국(P5) 중심의 UN이나 미국 주도의 NATO 체제도
완전히 평등하고 대등한 관계에 기반한 것은 아니다. 모든 주권국가의 완전한 평등관계는
역사적 현실에서는 종종 허구적 논리에 불과하거나, 또는 국가간 지향해야 할 가치로 인식되는
수준에서 만족해야 한다. 비록 불완전하고 때로는 편향적인 형태를 보이지만 핵강국이 주도하는
NPT 체제의 합리성과 핵비확산을 위한 노력을 긍정적으로 이해할 필요도 있다.
②보수우익적 입장에서, 북한 핵은 통일후 모두 우리 핵이 된다는 논리가 우리 사회에 넓게
퍼져 있다. 지난 ’90년대 초반 북한 핵문제가 발생했을 때,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핵보유
의지를 예찬한 소설(「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 소설은 최근 북한에서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이 이러한 대중의식을 반영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후 핵은 남북한 모두 약소국의
자주성과 민족적 자존을 지키는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간혹 전문가들 사이에서 핵의 평화적 이용과 유사시 핵개발의 ‘가능성’
마저 완전히 차단한 ‘한반도비핵화선언’의 정책적 한계를 비판하는 논리와 상당한 친화력을
지닌다. 이와 함께 흡수통일을 전제로 북한 핵을 마치 통일한국의 군사력의 자산 목록으로
여기는 대중적 심성을 반영하기도 한다.
③친북좌익적 입장에서, 북한 핵은 서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동경과 미국을 겨냥한 핵으로
우리가 크게 호들갑 떨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슬그머니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북한
핵은 본질상 북-미간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김정일 정권의 ‘민족공조’ 논리에 내심 ‘공조’하는
한편 우리는 핵문제보다는 남북관계 개선과 남북경협 사업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설득한다.
이는 반미 성향에 기반한 북한 핵에 대한 관용적 입장으로, 북한 핵문제에 대한 건강한 인식
능력의 상실과 정책적 대안 모색의 방기로 나타난다. 핵 위기에 대한 무책임과 함께 국민을
철저히 기만하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④보수우익적 입장에서, “김정일이가 핵폭탄 한 두개 가지고 ‘까불면’ 우리는 당장 미군
핵 반입을 요청하고 그 사이 우리도 수십 개 핵폭탄을 만들면 된다”는 주장도 핵문제에
대한 ‘정신병적’ 도착증세를 보여준다. 이는 북한에 대한 소아병적 우월주의와 더불어 핵문제에 대한 무지와 몽매에 뿌리를 둔 저돌적 행태의 소산이다.
결론적으로 북한 핵은 냉전시대 미-소간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에
의한 ‘공포의 균형’을 이룬 그러한 성질의 핵이 결코 아니다. 남한 사회는 북한
핵에 의해 멸망하기보다는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남한 사회 내부의 혼란과 균열에 의해 붕괴될 위험성이 더욱 크다.
핵을 보유한 김정일의 다양하고 치밀한 도발과 협박에 대해 ‘민족적’, ‘해방적’
논리로 설득하는 세력이 등장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거부·동조세력간 갈등은 이성적
판단을 상실케 하고 엄청난 혼란 상태와 유혈적 폭력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다.
이러한 악몽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 북한 핵 보유에
대한 세계의 충격과 우려와는 달리, 핵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핵불감증과
느긋한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현실이야말로 ‘정신병적’ 도착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젊은 세대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은 김정일 수령국가체제의 위협을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김정일 정권의 핵 위협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현실’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위기상황이다.
2003/05/07
|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