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사스 감염자가 6200명을 넘어섰다. 사망자수도 430명에 이르고 있다. 지난주 초에는 국내에도 사스로 추정되는 환자가 처음으로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였다. 혹시 나도 걸리는 것이 아닐까? 마스크라도 쓰고 다녀야 하는 건 아냐? 직업이 의사이다 보니 내게도 많은 질문이 들어온다.
사스는 전염병이다. 전염병이므로 다른 누군가에게서 병이 옮겨와야만 한다. 따라서 주변에 사스 환자가 없다면 병이 옮을 수도 없는 것이므로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아직까지 국내에는 사스 환자가 없으므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마스크를 하는 등 유난을 떨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주변에 사스 환자가 없었다고 안심할 수만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사스 환자가 스스로 사스에 걸렸다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심리는 묘해서 사스에 대한 공포가 크면 클수록 사스 환자가 스스로의 병을 부인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암 환자가 암에 대한 진단을 받은 후 자신이 암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비율이 절반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암에 대한 공포감에서 나온 반응이다. 사람은 공포를 주는 대상을 현실적으로 피할 수 없을 때에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만이라도 부정을 하여 평온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다. 비록 일시적인 회피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매일같이 언론 매체를 장식하는 사스 이야기나, 초기에 불리던 괴질이란 이름까지 사스 역시 이미 충분한 공포의 대상이다. 이로 인해 사스 위험지역에서는 사스에 걸려 열이 나는 상태에서도 사스가 아니고 그저 감기라며 스스로 자가 진단을 하고 해열제만 먹으면서 버티는 환자들이 보고되고 있다.
사실 사스에 걸린다고 다 죽는 것은 아니다. 사스는 인류를 위협해온 많은 전염병 중에 그 위험성이 중간 이하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우선 마땅한 치료제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도 치사율이 14% 정도에 불과하다.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사스에 걸린 사람이 집에서 혼자 약을 먹어가면서 버티더라도 질병이 지나갈 가능성이 80% 이상이란 뜻이다.
내친 김에 사스의 증상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사스는 바이러스 접촉 후 2-7일 정도, 최대 10일 간의 잠복기 이후 발병한다. 초기 증상은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고열과 근육통으로 몸살 증상과 비슷하다. 이후 3일 정도가 지나면 마른 기침이 나면서 호흡곤란 등이 나타난다. 이 상태에서 80% 이상의 환자는 일주일 정도 후부터 자연스럽게 증상이 나아진다. 반면 10-20%는 증상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사망에 이르는 매우 불행한 환자들 역시 문제이지만, 공중 위생의 측면에서는 좋아지는 환자들 역시 문제가 된다. 이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질병을 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콩과 중국에서는 단 한 명이 100인 이상에게 감염을 유발한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이 경우 정작 본인은 병을 가볍게 앓고 회복하였지만 자신에게 감염된 사람들 중 여럿은 사망하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전염병의 극복을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매우 중요한 측면이 된다. 역설적이지만 전염병만큼 우리 인류가 결국은 같은 공간에서 생활을 나누면서 사는 공동체임을 드러내는 것은 없다. 전염병은 한 사람의 무심한 행동이 타인의 생명까지 앗을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전염병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로서의 운명과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가져야 할 인간으로서의 예의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싱가포르의 총리가 국민들에게 전달한 글에는 매우 인상적인 예가 들어있다. 싱가포르 내의 한 도매센터에서 발생한 감염 사례이다.
도매 센터에서 일하는 72세 할아버지의 가족 8명은 열이 나자 동네 병원에 찾아갔다고 한다. 동네 의사는 이들 가족이 사스에 걸린 것이 의심된다고 진단하고는 구급차를 보내달라는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구급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문제의 가족들에게 마스크를 주면서 마스크를 쓴 채 진료실 바로 밖에서 앉아서 기다리라고 지시를 하였다. 얼마 후 가족들이 지시를 잘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나와 보자 놀랍게도, 그 가족들은 마스크를 벗어버리고 옆에 있는 식당가와 한약 상점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후 도매 센터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도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동네 의원에서 진찰을 받고, 그 다음에는 종합 병원,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한의원 2 곳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다른 종합병원 한 곳에 가서야 사스 지정병원으로 전원되었다고 한다. 이 사람 역시 여러 의료 기관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스를 전파한 것이다.
국내는 아직 위험지역이 아니므로 지금으로서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자신이 위험지역을 여행하고 왔다면 사스 바이러스에 접촉했을 가능성이 적지만 분명히 있다. 따라서 스스로 타인에게서 자신을 격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비록 열이 나는 등의 사스 증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직 잠복기에 해당하는 기간이라면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잠복기 후기에는 증상은 발현하지 않았지만 감염력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 이외에도 가급적 마스크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이 마스크는 나를 타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배려이다. 혹 마스크를 준비하기 어렵다면 타인과 1미터 이상의 거리를 두고 움직이고 공공이 만질 수 있는 물건은 만지지 않도록 한다. 알코올이나 살균용 크림을 준비하여 자주 손을 닦는 것도 필요하다. 바이러스의 체외에서의 생존기간은 3시간을 넘지 않으므로 내가 만진 물건이나 입에서 나온 미세한 침 가루가 묻은 것이라 할지라도 3시간이 지나면 감염력이 없으므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예방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다.
생계 등을 이유로 위험지역을 방문해야 할 경우라면 자신의 안전도 안전이지만, 자신이 다시 귀국해서 다른 사람에게 병을 전파하는 매개가 되지 않도록 예방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규정된 마스크의 착용, 타인과의 1m 정도의 거리 유지, 눈이나 입, 코를 만지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닦는 태도 정도면 충분하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사스는 최악의 전염병은 아니다. 치사율도 아주 높은 편은 아니며 증상이 없으면서 병을 전파할 수 있는 잠복기간도 길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바이러스가 공기를 통해 날아다니면서 감염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침가루에 포함되어 근접한 사람에게만 감염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지만 질병 전파를 통제하기 어렵고 감염시 위험성이 높은 어린이에게는 잘 발현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정도라면 무시무시한 통제가 없더라도 타인에 대한 적절한 배려를 통해서 극복이 가능한 상황이다.
전염병은 특성 상 조기에 대처하지 않으면 이후에는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바뀐다. 이때에는 엄청난 희생이 따를 뿐 아니라 방어에 드는 비용-효과 역시 현저히 낮아진다. 따라서 적절한 당국의 방역 대책이 필요하지만 시민 사회의 자발적인 참여 역시 중요하다.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측면에서 한 가지 덧붙일 말이 있다. 감염자와 감염 가능한 사람에 대한 배려이다. 공포감에서 나온 반응이겠지만 일각에서는 아예 중국에서의 입국을 당분간 막았으면 하는 바램을 표시하기도 한다. 해열제를 먹고서 귀국하는 사람도 있다는 보도를 보고는 이러한 행동을 범죄에 다름없다면서 인신 구속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루 것은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이 있다면 아픈 사람이 약자이다. 아픈 사람들 역시 타인을 위한 배려를 해야겠지만 더 많이 배려를 해야하는 쪽은 이들이 아니라 사회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자. 자신이 가족과 떨어져서 베이징에 있는데 열이 난다고 하자.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국내보다는 뒤떨어진 중국의 의료 시설에 대한 불신도 생길 것이다. 설사 의료기관의 능력이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말도 통하지 않고 지켜줄 사람도 없는 중국의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이 상황에서 열이 나는 상태에서는 비행기도 탈 수 없다면 해열제라도 먹고 귀국하고 싶지 않겠는가?
물론 이들이 해열제를 먹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귀국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이 역시 모럴 해저드다. 하지만 이를 막기 위해서 진정 필요한 것은 발열자에 대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다. 현대의학으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들이 귀국을 원한다면 안전한 방법으로 귀국을 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국내에서 격리하여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들의 모럴 해저드를 방지할 수 있다. 만약 사회가 이런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모럴 해저드이고, 약자에 대한 공격이다.
지난 수 년 간 중국과의 교류는 세계적인 경기위축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를 지지해주는 버팀목이 되어 왔다. 또한 우리가 하루 이틀 살고 마는 것이 아니므로 사스의 위험 속에서도 계속해서 누군가는 반드시 중국을 왕래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을 왕래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위험 대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들에게 적절한 배려를 해주고 격려를 하여 공포감을 씻어주어야 한다. 공포감이 없는 상태, 편안한 상태에 있을 때만이 불가피하게 중국을 왕래하는 사람들 역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할 수 있다.
국가와 시민사회는 사스가 단순한 통제가 아닌 시민사회의 협조와 자발적인 배려를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정책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럴 때만이 사스 이후 우리는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서로를 배려하며 어려움을 넘기는 집이 되는 집이겠는가? 아니면 서로를 피하면서 타인에게 문제를 전가하는 집이 되는 집이겠는가? 모두의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