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들어선지 70일이 지나간다.
지난 10년의 기억을 되돌이켜보면 지금은 집권세력이 속칭 '잘 나갈' 때이다.
개혁이니 IMF 극복이니 분명한 국가목표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를 업고 언론 및 야당과도 허니문을 즐길 때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청와대에선 걸핏 하면 조중동의 탓을 한다.
그리고 두 번의 패배에도 전혀 반성 없이 딴지 거는 야당을 원망한다.
하지만 그 '남의 탓' 타령을 들을 때마다 왠지 맥이 풀린다.
그 이야긴 집권초반인 지금 나올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중동은 이미 지난 대선에 치명상에 가까운 정치적 패배를 경험했다.
그 전에는 언론 축에도 끼워주지 않던 인터넷미디어들이 대선 여론을 주도했고,
선거 막판엔 사설을 대신해 휴대폰 단문메시지(SMS)가 표심을 갈라놓았다.
한나라당은 어떤가. 그 곳은 지금 공황상태다.
그 동네 사람 표현대로 하면 도저히 질 수 없는 두 차례 대선에 연거푸 패하면서,
이제는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는 탈진상태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집권세력은 왜 오늘도 '남의 탓'만 하는가.
먼저 스스로 무능을 탓하라. 그리고 지금이라도 과욕을 버리고
책임질 수 있고 반드시 책임져야 하는 국정우선순위에 모든 걸 걸어라.
집권초반은 지지세력의 결집력도 강하고 국민들도 인내심을 갖고 협조하며
심지어 반대파들조차 공격을 자제하고 지켜보는, 그야말로 모든 여건이 우호적인 때다.
당연히 이 시점에 '명백한 국가목표'를 제시하고 국민을 설득하며
국력을 결집시켜 집권 5년에 이룰 일의 절반을 해놓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국민의 마음을 휘어잡는 국가목표가 무엇이 있는가.
벌써 10년 전부터 늘 떠들어온 개혁이란 낡은 레코드 소리가 지금도 요란하다.
개혁이란 혁명과 다르다. 革자가 들어가 스스로 헷갈리는지 몰라도
그건 늘상 주의깊게 해나가야 하는 체제의 reform이자 repair works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의 국가목표는 무언가. 그건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모든 국민이 알고있는 가장 절실한 문제를 장기적인 국익의 관점에서 조정하면
바로 나오지 않는가. 최우선순위인 국가의 안전보장 그리고 한국경제의 새로운
성장엔진 찾기 그리고 그에 걸맞은 국가자원의 재편성이다.
그런 이야긴 벌써 제시를 했다고? 아니올시다. 그렇지 않습니다.
국가목표를 거론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국민이 공감하고 따라와줘야 하는게 아닌가.
국가목표의 제시가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세 가지 요소가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비전과 정책의지 그리고 신뢰다. 특정 국가현안에 관한 분명한 비전
그리고 흔들림 없는 정책의지를 바탕으로 그에 관한 확고한 신뢰를 불러오는 것이다.
하나씩 따져보자.
지금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에서 관건은 북핵의 해결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해 무슨 비전을 제시했나.
초기엔 전쟁위협을 과도하게 강조하며 늘 '평화적 해결'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금은 북미간 문제라며 다자회담 참여에 집착하지 않겠다고 한다.
한마디로 당사자론이 아니라 중재론의 연속이다.
북핵이 겨냥하는 곳은 서울이 아니고 도쿄와 워싱턴이며,
북핵은 단지 협상용이고 대화만 잘 하면 만사형통할 것이란 '편리한' 사고.
그럼 대한민국은 도대체 무엇이고 우린 왜 이리 골치 아파야 하나.
북핵이 서울을 겨냥한 것도 아닌데 감히 군사적 옵션까지 고려한 건 누군가.
북핵은 협상용인데 대화를 하자는 요구에 지금껏 무성의하게 시간을 끈 건 누군가.
그리고 대한민국은 왜 당사자도 아니면서 이리 신경을 쓰고 only reward 해야 하나.
이토록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엉터리 비전으로는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
분명히 말하지만, 북핵은 대한민국의 존망이 걸린 생존의 문제다.
지난 반세기 겪어온 것처럼 북한이 체제안전을 위해 시비를 걸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 게다가 재래식 무기와 차원이 다른
핵정치로 체제지원을 강요하고 체제내부 단속을 꾀해나간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그에 맞서 대처할 효과적인 정책수단은 없다.
이토록 냉엄한 국가사회의 생존논리를 도외시한 소박한 기대심리로
국가안보의 비전을 제시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며,
그러하기에 다자회담에의 참여를 집착 않겠다는 배짱 좋은 이야기까지 나온다.
경제는 어떤가. 지금껏 줄곧 외생변수만 탓해왔다.
기업금융이 씨가 마르고 중장기투자는 사라져가는데
한국경제의 펀더멘털은 탄탄하다며 기다려달라고만 한다.
재벌집단의 오너쉽을 싹 회수하고 속살이 훤히 비치도록 지분관계를 정리하고
M&A시장의 쇼윈도우에 내다놓으면 기업가치가 저절로 올라가고
투자가 줄을 이을 것이라 보는가.
만약 진정으로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로 가겠다면 솔직히 밝혀라.
89년 이후 15년 동안 1000~500 사이를 널 뛰기 하는 주식시장을
어떻게 정상화할 것인가 분명한 대책이 있는지,
그리고 한국의 제조업을 포기하고 나서 금융만으로 4900만을
나아가 7천만을 먹여살릴 확실한 로드맵이 있는지,
나아가 IMF 이후 2/3 수준으로 떨어진 원화가치를 다시 살릴 복안이 있는지 말이다.
이렇듯 중장기 대책도 없이 한국경제를 뒷받침 하는 재벌체제를
오로지 자본시장의 시각에서 해체하겠다는 것은, 재벌의 개혁이 아닌
재벌 죽이기가 아닌가. 그렇게 재벌을 죽이고나서 그 다음에 도대체 무엇을 갖고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으로 삼을 것인가.
오로지 가계대출과 소매금융만 일삼는 공룡 리딩뱅크로,
아니면 올망졸망한 중소기업을 모아 대만식 경제모델로 나가겠다는 것인가.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감당할 수도 없는 전방위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교육문제 노동문제 한총련문제 그리고 법조계와 국가정보기관까지 도무지 건드리지
않는 곳이 없다. 이건 repair 수준을 넘어선 가히 전면적인 remodeling이 아닌가.
이렇게 곳곳을 들쑤셔놓고 그 뒷감당은 도대체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아니 뒷감당 문제를 떠나 지금 벌이는 전방위 개혁의 면면이
국가안보와 성장엔진 찾기 라는 최우선순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인가.
왜 그리 마음이 급한가. 내년 총선의 성적표가 그리도 중요한가.
아마츄어리즘에도 노무현정부를 기대하는 단 한 가지 근거는 동기의 순수성이다.
그러나 차츰 그 믿음마저 약해져 감을 어찌 할 수 없다.
고작 취임 70일인데 안타깝게도 허니문은 사라졌다.
한 나라의 수장이 되고서도 여전히 피해의식에 젖어있는 대통령,
비전 부재에도 아랑곳없이 국정의 우선순위에 역량을 집중치 아니 하고
감당 못할 전방위 개혁을 추진하는 집권세력의 안이한 국가인식,
그리고 내 편 니 편을 가르며 통합보다 구분짓기에 사활을 걸고있는 집권여당,
모든 건 정치세력 그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다.
지금껏 고통 속에서 인내심을 갖고 70일을 지켜봤다.
"실패한 김구가 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다짐을 수시로 떠올렸다.
그러나 국가사회의 생존을 저울질하는 화급한 오늘의 시점에서,
더 이상의 국정난맥은 눈 뜨고 볼 수만은 없다. 국정에는 연습게임이 없지 않은가.
이제 더 이상 혹시나 하는 희망과 기대를 버리고
냉정히 향후 대한민국의 향배를 고뇌할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